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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구로신난다

한국의 안선생님.. -故전규삼 할아버지-

작성자3기 차종평(kemp)|작성시간08.06.17|조회수319 목록 댓글 2
뉴스보다보니.. 정말 한국농구의 선구자라는 생각이 들어서.. ㅎㅎ
슬램덩크의 안선생님 생각도 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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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故 전규삼옹

2003년 5월 8일 밤 9시. 한국 농구의 큰 별이 졌다. 향년 88세를 일기로 타계한 전규삼옹은 농구코트의 대부(代父)라 일컬어진다. 전옹은 1961년 교직에서 은퇴하고 송도중고교 농구 지도에만 전념했다. 전옹을 회고하는 사람들은 농구부 코치가 아닌 ‘할아버지’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한국 농구의 전설이 된 수많은 별들을 손자처럼 키워낸 전옹은 전설 중의 전설이었다.

‘가드의 산실’ 송도고… 故 전규삼옹을 회고하다

농구 명문 송도고는 가드의 산실이다. 유희형-김동광-이충희-강동희-신기성-김승현 등 이름만 들어도 입이 벌어지는 가드 계보는 모두 송도고에서 전옹의 가르침 속에 재목으로 성장하며 이뤄졌다. 전옹의 가르침은 특별했다. 만화 ‘슬램덩크’ 속에서나 나올 법한 이상적인 가르침은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숙연하게 만든다. 당시 구타와 욕설로 얼룩져있던 학원농구에서 전옹은 단 한 번의 매를 드는 일이 없었다. 전옹이 가르친 것은 이기기 위한 농구가 아닌 즐기는 농구였다. 송도고가 가드의 산실이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송도고의 가장 큰 특징은 당시로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스피드를 앞세운 창조적인 농구였다. 60년대 초반만 해도 미국 농구에 대한 관심이 적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전옹은 미국 농구잡지를 즐겨 볼 정도로 선진 농구에 관심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마치 손자를 돌보듯 선수들을 대했다는 전옹은 자율 농구로 흥미를 유발시키고, 선수로 키우기보다는 그에 앞서 인간으로 성장시켰다. 송도고 선수들의 운동은 항상 오후 2시 이후가 돼서야 가능했다. 학교 수업을 무조건 들어야 한다는 전옹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송도고 시절 유희형은 새벽 7시에 슈팅 연습을 한 후 학교 수업시간에 졸지 않기 위해 일부러 맨 앞자리를 맡을 정도였고, 신기성은 “농구를 못해서 야단맞은 적은 없어도 숙제를 안 해서 혼난 적은 있다”고 전한다.

송도중을 나온 이충희가 송도고 1학년이 돼서야 경기에 나설 수 있었듯 전옹은 기본기를 철저하게 가르쳤다. 최고의 테크닉을 갖고 있는 김승현도 인터뷰마다 “할아버지께서 가르쳐주신 기본기 덕분”이라는 말을 서슴지 않을 정도다. 전옹은 기본기와 체력, 순발력이 바탕이 돼야 비로소 개인기를 통한 팀 플레이가 가능하다는 지론을 갖고 있었다. 송도고의 전매특허였던 전광석화 같은 속공은 기본기를 바탕으로 완성된 것이다. 60년대 유희형이 이끌던 송도고의 속공은 단 2~3초 만에 이루어졌다고 하니 얼마나 빨랐는지 짐작이 간다.

당시 유희형과 함께 송도고를 이끌었던 센터 서상철(전 산업은행 감독)은 “공이 림을 맞은 후 발이 바닥에 닿기 전에 유희형에게 패스가 나갔고, 유희형의 손에 닿은 공은 곧바로 상대 골대까지 연결되어 득점으로 이어졌다”고 기억했다. 전옹의 속공 훈련 방식은 그랬다. 드리블을 절대 치지 못하게 하는 속공이 기본 방침이었다. 그 당시 수원 야외코트에서 벌어진 종별선수권대회에 참가한 송도고는 경기 종료 3분을 남겨 놓고 상대에 10점을 뒤져 패색이 짙었지만, 경기를 마치고 난 후 스코어는 10점을 오히려 이긴 상태였다. 속공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는 실례다.

전옹의 자율 농구는 당시로서는 금기시 됐던 모든 기술을 허락하기도 했다. 사실 허락이 아닌 권장이었다. 훅 슛을 비롯해 비하인드 백 드리블이나 비하인드 백 패스 등 다른 고교라면 건방지다고 흉내도 못 냈을 동작들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게 만들었다. 당시 ‘에어 슛’이라고 불리던 앨리웁도 송도고에서는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당장의 성적보다는 국제 감각을 익히기 위해 미래를 보고 가르친 전옹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항상 수비를 달고 슛을 쏘는 것을 강조했던 다른 고교와 달리 전옹은 포지션이 어떻든, 자리가 어디든 상관없이 수비를 피해서 슛을 쏘는 것을 가르쳤다. 오히려 전옹은 수비를 붙이고 슛을 쏘면 용서를 하지 않았고, 수비를 속이라고 가르쳤다. 농구는 결국 사기의 스포츠라는 것이다. 당시 송도고를 졸업하고 고려대로 진학한 서상철은 송도고 시절과는 정반대로 가르치는 센터 플레이에 적응을 못하고, 고생 끝에 포워드로 전향해 국가대표로 활약하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전옹 가르침의 또 하나 특징은 맞춤형 교육이었다. 전옹은 선수들의 특성에 맞춰 드리블이면 드리블, 리바운드면 리바운드, 그 선수가 잘 할 수 있는 것을 가르쳤다. 강동희와 김승현은 송도중 시절 키가 작아 다른 학교 같으면 받아주지 않을 상황이 될 수도 있었지만, 전옹은 소질 있는 선수들을 발굴하는데도 일가견이 있었다. 당시 서울에 있는 학교들은 못 하게 하는 것들이 많았지만, 전옹은 강동희와 김승현에게 “너희들 마음껏 하고 싶은 것 해라”라고 풀어줬다. 전옹의 미래를 보는 눈이 아니었다면 한국 가드계의 거목 둘을 못 볼 수도 있었다는 생각에 아찔함 마저 든다.

1996년 코치직 은퇴 후 지병인 심근경색으로 타계하기 며칠 전까지 매주 두 차례씩 빠지지 않고 학교를 찾아 손자뻘 되는 선수들을 지켜보고 갔다는 전규삼옹의 제자 사랑은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가슴 찡한 감동을 안긴다. 일생을 바쳐 한국 농구의 전설로 남은 전규삼옹의 가르침이 아직도 과거의 악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눈앞에 성적에만 급급해 하고 있는 현직 아마추어 코치들의 귀감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글 서민교 기자

JUMPBALL 2008년 06월호(발행일 05월 25일) 기사

2008-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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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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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9기 孫準基Answer | 작성시간 08.06.17 영화로 만들어도 될 것 같은 내용이네요...벌써 기사가 완전 한편의 시나리오의 시놉시스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기사에서 배울점중 가장 크게 느껴진 것이 공부잘하라는 것입니다. ㅎㅎㅎ 공부에 좀 소홀해서..... 또 배울점은 체력과 순발력과 기본기 그리고 나서 경기를 즐기는 것 !
  • 작성자6기 김유진 | 작성시간 08.06.17 준기야 넌 충분하단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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