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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구간-신사임당길

꿈에도 그리운 곳 ... 신사임당(申師任堂) 길

작성자걷자(서울/강릉)|작성시간26.03.21|조회수447 목록 댓글 13

https://youtu.be/Sso-C6rAsgg?si=iNTxI7IGDSI72RKr

연 - 김윤아 (사임당, 빛의 일기 OST )

 

꿈에도 그리운 곳 고요한 물빛
새벽이 잦아드네 아스라이
외로운 하늘가에 요요한 달빛
새들이 날아드네 어지러이
흐느끼는 바람에 흩날리는 마음은
다시 못 올 날의 노래가 그리워
흐드러진 꽃이 흩어지는 연이
하염없이 지네 애처로이 지네
아름다운 님이여 언제 그리 다시 돌아가려오
아름다운 님이여 그 노래 들려주오

2026년 3월 21일 신사임당(申師任堂) 길   /  위촌리 송양초교 앞에서...(09:49)

 

신사임당 길 구간은 조선시대 여류 양대(兩大) 시인, 화가인 

신사임당(1504-1551)과 허난설헌(1563-1589) 두 사람의 삶 속으로 들어 가 함께 걷는 길이다
두 사람은 고향이 강릉으로 토호(土豪) 집안이지만 두 사람의  살아온 삶은 상당히 다르다.

이 구간은 오죽헌, 선교장, 경포대, 허균허난설헌 유적공원등 문화 역사 자료가 상당히 많은 곳이다.

만나면 언제나 반가운 사람들...에셈, 키카푸, 선유심, 블랙빈

미수기님과 체육(?) 동호회님들...

미네르바님은 만화영화 '원피스'에 등장하는 해적(?) 두목 같다...^^

왕년에 위촌리에서 껌 좀 씹으면서 놀던(?) 지영 언니 (일명 반팔 언니)...

이사님 Opening...(10:02)

(신사임당길 출발지 송양초교 앞 주차장이 협소해 다음엔 역방향으로 허난설헌 기념관에서 출발해 볼 계획이라고...)

11구간 지기 라몽님 & 미네르바님 ... (가래떡 감사히 잘 먹었습니다)

기분 좋은 봄 햇살과 함께... 라몽님 리딩으로 힘차게 출발... (10:09)

 

위촌리 (渭村里), 우추리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에 속하는 법정리.

위촌리는 약 400여 년 전 조선 인조 때 경상북도 풍기군수를 지낸

위촌(渭村) 김상적(金尙積)이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여 살았기에 그의 호를 따서 지명이 생겼다.

위촌리를 우추리라고도 하는데, 우출(牛出)이는 위촌리 마을에서 가장 안쪽에 있는 골아우(鯨岩)에

소가 반듯하게 누워있는 와우형(臥牛形)에서 소나 나왔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다.

위촌리는 본래 강릉군 성산면 지역으로 우출이라 하다가

1916년에 골아우, 새잇말, 송두골, 항생골, 지암을 합하여 만들었다.

1955년 9월 1일에는 강릉읍이 강릉시로 승격됨에 따라 명주군에 편입되었으며,

1995년 1월 1일 도농 통합에 따라 강릉시에 통합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위촌리는 멍애재와 사실이재에서 내려온 줄기에 싸여 있고, 위촌리 가운데로는 황계와 위촌천이 흐르고 있다. 

근처에 교동택지 및 유천택지가 조성되어 준 도심의 주거생활이 편리해지고,

근교농업 및 귀촌 귀농지역으로 각광받으면서 주택 및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

또한 위촌리의 송양 초등학교는 한때 폐교위기에 처했었으나,

도심에서 많은 학생들이 몰려들어 교사를 새롭게 증축하는 등 활성화되고 있다. 도배마을로 유명하다.

이 길은 죽헌 저수지 초입 까지는 산길과 숲길이여서 걷기에 좋다.

총과 대포를 쏘고 있는 테러범들...( 이 사람들 중동에 파병해야 하는데...)

시나브로 우리 곁으로 다가오고 있는 봄...

봄의 요정들과 눈인사와 악수하기에 바쁘다.

첫 휴식...(10:38)

국땅님 손수건 색상이 화려하고 멋지다.

죽헌 저수지 가기 전 삼거리에서...

무언가를 바라 보고 있는 ... 키카푸님 &선유심님

죽헌 저수지 상류 초입에 들어서서 저수지 둘레길을 걷는다...

자작나무 사이로 ...

이거슨 이름이 이상한 꽃...

죽헌저수지 (竹軒貯水池). 경포저수지

죽헌동을 흐르는 운정천의 상류를 막아 조성하였다. 

죽헌저수지에서 흘러나온 물은 경포호로 유입되는데,

경포호 주변의 넓은 들판에 조성된 농업용수로 주로 이용된다.

죽헌저수지는 1966년부터 1972년까지 약 7년여에 걸쳐 관개 개선을 위하여 조성되었다.

백두대간의 한 봉우리인 곤신봉에서 동쪽으로 강릉 시내를 향하여 뻗어 내린

산줄기의 연장선상에서 강릉 시청의 북서쪽 약 2㎞ 지점에 땅재봉(120m)이 있다.

땅재봉에서 북쪽으로 성산면 위촌리와 강릉시 유천동·죽헌동과의 경계를 이루는 분수계가 있는데,

그 동쪽 사면으로 흘러내리는 작은 지류들이 모이는 지점에 제방을 쌓아 조성하였다.

죽헌저수지로 인해서 혜택을 받는 농지 면적은 262ha이다.

저수지의 수원공(水源孔)은 제방 구조는 토제(土堤)이며, 제방 길이 115m, 제방 높이 17.3m이다.

국땅님과 연초록님

저수지길 끝자락에서 잠시 휴식...(11:55)

후미가 꼭 선두 같다...( 저 뒤로 50명 정도가 따라오고 있을 것 같다)

제일 선두 테라씨...

평화로워 보이는 저수지 어귀 풍경...

바우길 이정표도 나무라고 버섯이 자라고 있다.

죽림사

위촌천 둑방길을 빠르게 걸어간다.

한옥마을... 양지바른 이곳에서 도시락을 먹었다...(12:35)

 

강릉오죽한옥마을

한옥은 예로부터 작위적인 형태가 아닌 자연을 관조하며 주위의 환경요소와 어울리도록 지었기 때문에

주위의 경관요소를 거르지 않는 곳에 집을 짓되 그곳에서 나오는 재료를 사용하여

그곳의 지세에 맞는 형태의 것이 되도록 하였다.

초가의 선은 뒷산의 모양을 닮았고 기와의 선은 양끝을 잡은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늘어진 새끼줄의 선을 표현하며,

처마는 후림과 조로를 두고 용마루의 가운데를 처지게 하여

자연스러운 형태를 나타나게 하여 유연성을 품고 있다.

강릉오죽한옥마을은 이러한 한옥의 특징을 최대한 살려 자연스럽고 언제 보아도 정겨운 공간으로 조성하였다.

비록 기교 있는 장식으로 화려하지는 않지만, 재료 본연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 담백함과 순수함을 나타내었으며,

마을 곳곳에 심어진 대나무의 경관은 바라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차분해지고 심신의 안정을 찾을 수 있다.

또한, 조선의 대표학자 율곡 이이가 태어난 집으로 유명한 오죽헌과 강릉한옥마을을 연계하여

율곡의 사상을 전파할 수 있는 인성 교육장을 운영하며,

다양한 전통문화체험을 통해 전 세계인에게 한옥의 우수성과 전통성을 알리는 매개체가 될 것이다.

식사 후 잠시 망중한(忙中閑)...(13:22)

곧 만개(滿開) 할 것 같은 목련...(목련이 피고 지면 봄은 다 간 것이라고 하는데... 봄은 참 짧다는 생각이...)

점심 식사 후 모이는 오죽헌 앞...(13:42)

 

오죽헌(烏竹軒)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가 태어난 몽룡실(夢龍室)이 있는 별당 건물로,

우리나라 주택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 중의 하나이다.

검은 대나무가 집 주변을 둘러싸고 있어서 ‘오죽헌(烏竹軒)’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오죽헌은 조선 중기 사대부 주택에 많이 나타나는 별당과 그 평면형식을 같이 한다.

건립 연대는 명확하지 않지만 단종 때 병조참판과 대사헌을 지낸 최응현(崔應賢, 1428∼1507)

고택이라고 불리는 점으로 미루어, 적어도 15세기 후반에는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전기의 결혼제도는 서류부가혼(壻留婦家婚)으로 남자가 결혼을 하면

부인의 집이나 그 근처에 살고 처가의 재산을 물려받는 풍습이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최응현의 집은 그의 사위이자 신사임당의 외조부였던 이사온(李思溫)에게 물려지게 되었다.

이사온과 같이 살던 사위 신명화(申命和)에게는 딸이 다섯 있었는데,

둘째 딸인 신사임당은 덕수이씨 집안의 이원수와 결혼을 하였고, 넷째 딸은 안동권씨 집안의 아들과 결혼을 하였다.

이사온의 집을 물려받은 신명화의 부인 용인이씨는 외손인 이이와 권처균(權處均)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었는데,

그 중 오죽헌이 속해 있는 고택은 묘지를 관리하는 조건으로 권처균에게 분재되었다.

이때부터 이 고택의 소유권은 안동권씨 집안의 후손들에게 물려졌다.

1938년 조선문화재보호령에 의해 국가문화재 보물로 지정되어 보호되다가,

1975년 오죽헌 정화사업으로 문성사와 기념관이 건립되면서 안채와 곳간채 및 사주문이 해체되었다.

1995년 오죽헌 뒤의 고택이 다시 복원되어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오죽헌은 조선 중기 사대부 주택의 별당 모습을 살필 수 있는 곳이다.

뿐만 아니라 포를 구성하는 방식이 주심포에서 익공식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모습을 나타내고 있어 포의 변화과정을 짚어볼 수 있는 중요한 유물이라 할 수 있다.

신사임당(율곡 이이의 어머니이자 조선 중기 강릉 출신의 여류 예술가)

 

踰大關嶺望親庭(유대관령망친정)

慈親鶴髮在臨瀛   자친학발재임영
身向長安獨去情   신향장안독거정
回首北村時一望   회수북촌시일망
白雲飛下暮山青   백운비하모산청

늙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
외로이 서울로 가는 이 마음.
돌아보니 북촌은 아득도 한데
흰 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 내리네.

踰大關嶺望親庭(유대관령망친정)  / 대관령을 넘으며 친정을 바라보다
어머니의 흰머리를 학의 머리(鶴髮)로 표현한 게

특이하고, 저무는 산위를 떠 도는 흰 구름(白雲)
조차도 어머니의 하얀 머리칼을 연상케 하는 
구절에서 여성 특유의 섬세함이 돋보이는 사모곡의 시다.

 
사친(思親)

千里家山萬疊峰 천리가산만첩봉

歸心長在夢魂中 귀심장재몽혼중

寒松亭畔雙輪月 한송정반쌍륜월

鏡浦臺前一陣風 경포대전일진풍

沙上白鷗恒聚散 사상백구항취산

波頭漁艇每西東 파두어정매서동

何時重踏臨瀛路 하시중답임영로

綵舞斑衣膝下縫 채무반의슬하봉

천리 밖 우리집 첩첩 산 넘어 아득한데

가고 싶은 마음 늘 꿈속까지 가득하네

한송정 하늘과 물에는 둥근달 떠 있고

경포대에는 한바탕 바람이 불고 있으리

바닷가 모래밭에는 갈매기들 모였다 흩어지고

수평선 위에는 고깃배들 이리 가고 저리 오리

언제 고향길 다시 밟아

비단 색동옷 입고 부모님 곁에서 바느질할꼬

신호를 기다리면서...

경포생태저류지 (鏡浦生態貯留池)

강원도 강릉시 죽헌동에 있는 경포호 수량 조절을 위해 조성한 생태 저류지.

경포생태저류지 조성은 녹색 도시 조성 사업의 일환으로 경포 습지가 조성되면서

경포 호수로 유입되는 수량을 조절하기 위해 2009년부터 공사가 시작되었다.

2009년부터 2015년까지 경포생태저류지 공사가 진행되었는데, 

경포호 유입 하천인 경포천(鏡浦川)[강릉시 죽헌동 일원]에 생태 저류지를 조성하고,

주변 환경을 정비하여 시민 편의 시설인 산책로, 꽃밭 등을 조성하였다.

2010년 31만 9000㎥에 호안 및 토공(土工) 공사를 실시하였고,

2011년 군정교(郡丁橋) 확장, 방류 수문 및 수량 조절보 설치,

2013년 저류지 조성 1단계 공사를 준공하였으며,

2014년부터 2015년 2단계 공사로 친수 공간 조성 공사를 진행하였다.

경포생태저류지는 오죽헌(烏竹軒)과 선교장(船橋莊) 사이에 있는 

경포천과 경포천 주변 농경지에 조성한 생태 하천이다.

저류지 중심을 가로질러 메타세쿼이아를 심어 산책로를 조성하였다.

메타세쿼이아 (Metasequoia  & dawn redwoods) 길...

중국 원산으로 호수나 강가에 심어 기르는 낙엽 큰 키나무이다.

높이 35-50m, 지름 2.0-2.5m이다. 가지는 옆으로 퍼진다.

수피는 적갈색이나 오래된 것은 회갈색이고 세로로 얕게 갈라져 벗겨진다.

잎은 마주나고, 선형으로 길이 3-7cm, 폭 1.5-4.0cm이며, 깃꼴로 갈라진다.

잎 뒷면 중륵 양쪽에 4-6줄로 배열하는 기공이 있다. 

자성구과는 타원형이다. 열매는 구과, 씨는 길이 5mm쯤이다.

화석식물로 알려져 있었으나, 1940년대에 중국 후베이 성에서 발견되어 신종으로 발표되었으며,

이후 중국을 비롯하여 세계 각지에서 공원수, 가로수로 식재하고 있다.

배다리마을

강원도 강릉시 운정동에 있는 자연 마을.

배다리(船橋)는 마을 앞 경포호 가에 배가 닿는 다리가 있어서 생긴 이름이다.

예전에는 경포호가 넓어서 마을에서 호수 동쪽에 있는 초당이나 강문으로 다닐 때는 배를 타고 다녔는데,

이때 배를 타거나 내릴 때 편리 하도록 하는 다리가 있었다. 이 다리가 있어 마을이름이 배다리로 되었다.

마을 앞으로는 운정천과 경포의 넓은 들이 펼쳐지고,

뒤로는 시루봉과 태장봉에서 내려온 줄기가 이어지는 배산임류형 마을이다.

배다리에서 동쪽으로 가면 창덕사·해운정·경포호, 서쪽으로 가면 통 안에 있는

황산사(강릉최 씨 최필달의 사당)와 날밀, 남쪽으로 가면 경포천, 북쪽으로 가면 서지, 사우골이 된다.

배다리에는 창덕사, 매월당기념관과 조선시대 양반가옥인 선교장과 부속건물인 안채, 동별당, 서별당, 열화당, 활래정, 행랑채 등이 있다.

선교장 활래정 앞을 지나간다...(14:11)

 

강릉 선교장 江陵船橋莊

선교장은 강원도 지역에서 가장 잘 남아 있는 품위 있는 사대부 가옥이다.

강릉시에 경포 쪽으로 4km쯤 떨어진 선교장은

조선시대 상류층의 가옥을 대표하는 곳으로, 국가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경포호가 지금보다 넓었을 때, “배 타고 건넌다"라고 하여

이 동네를 배다리 마을(船橋里)이라 불렀는데, 선교장이란 이름은 바로 여기서 유래한다.

선교장은 조선 영조 때(1703년) 효령대군의 후손인 이내번이 족제비 떼를 쫓다가

우연히 발견한 명당자리에 집을 지은 후, 그 후손이 지금도 살고 있다.

총 건평 1,051.24m²(318평)으로, 긴 행랑에 둘러싸인 안채, 사랑채, 동별당, 가묘 등이 정연하게 남아있고,

문밖에는 수백 평의 연못 위에 세워진 활래정이라는 정자가 있어, 정원까지 갖춘 완벽한 구조를 보여 준다.

선교장은 건물뿐 아니라 조선 후기의 주거생활과 생활용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주변 경관과 어우러진 풍치가 아름답다. 선교장의 사랑은 열화당이라 하며,

여기에는 용비어천가, 고려사 등 수천 권의 책, 글, 그림 등이 소장되어 있다.

* 안채
안채는 1700년 이전에 건립된 건물로 세종의 형인 효령 대군의 10대손인 이내번이 창건한 것으로

선교장 건물 중 가장 서민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며

안방과 건너방이 대청을 사이에 두고 있으며 부엌이 안방에 붙어 있다.

* 열화당(悅話堂)
열화당은 남주인 전용의 사랑채로서 내번의 손자 후가 순조15년(1815)에 건립하였으며

당호인 열화당은 도연명의 귀거래사 중 (悅親戚之情話)에서 따왔다고 한다.

열화당은 3단의 장대석 위에 세워진 누각형식의 건물로 아주 운치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 동별당(東別堂)
안채와 연결된 주인 전용의 별당건물로 이근우가 1920년에 지은 ㄱ자형 건물이다.

동쪽에 2개, 서쪽에 1 개의 온돌방을 만들고 앞면에는 넓은 툇마루를, 뒷면과 동쪽은 좁은 툇마루를 돌렸다.

* 활래정(活來亭)
활래정은 선교장 정원에 판 인공 연못 위에 세운 정자로 순조 16년(1816) 열화당을 세운 다음 해에 세웠다.

정자명은 주자의 시 (관서유감) 중 "爲有頭源活水來"에서 땄다고 한다.

이 건물은 마루가 연못 안으로 들어가 돌기둥으로 받친 누각형식의 ㄱ자형 건물이다.

활래정은 벽면 전부가 분합문의 띠살문으로 되어 있으며 방과 마루를 연결하는 복도옆에 접객용 다실이 있다.

* 기타
안채와 열화당 사이에 서재 겸 서고로 사용하던 서별당이 있는데 소실되었다가 1996년에 다시 복원하였으며,

건물의 전면에는 행랑채가 있다. 또한 건물의 측면에는 원래 창고였으나

개화기 때 신학문을 가르치던 동진학교(東進學校)터가 있다.

 

*

훠이~~ 훠이~~
윗녘새야... 아랫녘새야... 우리 논에 앉지 말고
배다리 이통천 집으로 가라~~

하늘을 바라보며 새를 쫓는 어느 노인네의 외침! 그냥 외치던 소리 같지만...
배다리 이통천! 배선, 다리교, 선교장 이통천 집으로 가라 라는 말이다.
선교장이라는 오랜 전통가옥... 아흔아홉 칸 대궐 같은 집
선교장, 배다리의 말 그대로 배를 타고 이곳에 왔다 하여 선교, 시골마을 장을 써서, 선교장!
지금이야 경포호가 4.3km 둘레로 작지만 과거엔 선교장 인근까지 경포호가 컸다 한다.

70년대 식량증산을 위해 호수를 메워 논을 만들어 지금의 형태를 갖추게 됐다.
선교장은 대대로 인심이 후해 이웃은 물론이고 시인 묵객까지 정성으로 베풀었다 한다.
특히 14세손인 이의범이 과거에 급제하여 통천에서 군수를 지낼 때

강릉이 극심한 가뭄으로 어려울 때 수천 석의 쌀을 풀어 도왔는데,

그때 배다리 이통천댁이라는 택호가 등장한다.
그만큼 지역에서 최고의 부자였다 하니...
저마다 새를 쫓으며 부잣집 이통천 집으로 가라고 외친 게 아니었겠는가?

세종도 감탄한 천재소년

‘매월당김시습기념관’은 강원도 강릉시 운정동에 있는 김시습 관련 유물·자료를 전시해 놓은 기념관이다.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 소설인 『금오신화』의 작가이자 생육신의 한 사람인

매월당 김시습의 절의 정신을 계승하고 시와 소설에 담긴 김시습의 고매한 얼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으며,

경포 도립공원 내에 전통 한옥의 형태로 만들어졌다. (출처 : 강원도청)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떻게 행동했기에 그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을까?

사람들은 그를 방랑한 천재시인으로 꼽기도 하고, 절의를 지킨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꼽기도 하며,

선비 출신이면서 승려가 되어 기행을 벌인 기인이라고,

또 최초로 남녀 간의 사랑을 주제로 한 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지은 작가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한편으로는 농민의 고통을 대변한 저항의 시인으로,

철저하게 기일원론(氣一元論)을 주창한 성리학자로 평가하기도 한다.

어느 것 하나 틀린 것은 없을 것이요 또 그는 이런 모든 모습을 고스란히 갖추었다.

창덕사 彰德祠奉安九公實記

강릉김 씨 한림공파 관련 아홉 인물들의 위패를 창덕사(彰德祠)에 봉안하며 기록한 기문(記文).

강릉김씨 한림공파 후손들은 1965년 선조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해

강릉시 홍제동에 창덕사를 창건하고 선조 9명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이후 1994년 도시계획으로 사우를 현재의 위치인 강릉시 운정길 107-11 (운정동 292번지)로

이건 하면서 9명의 위패도 함께 옮겨 봉안하였다.

[내용]

9명의 행적, 출사 및 관력 등을 순서대로 기술하였다. 김영견(金英堅)은 신라대나마한림랑(新羅大奈麻翰林郞),

김견웅(金堅雄)은 고려조에 호(戶)·예(禮)·병부상서(兵部尙書), 김징우(金徵祐)는 고려조에 간의병부상서(諫議兵部尙書), 

김양(金陽)은 고려조 예부상서(禮部尙書), 김원걸(金元傑)은 고려조 병부상서(兵部尙書), 

김상기(金上琦)는 고려조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김인존(金仁存)은 형부평장사(刑部平章事),

김영석(金永錫)은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은 단종조 생육신 중 한 사람이다

시루봉 오르기 전 잠시 휴식...(14:32)

시루봉 (엄청나게 높은 해발 87m)을 올려다본다.

화마(火魔)가 휩쓸고 간 지도 몇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황폐한 흔적에 마음이 아프기만 하다.

사방이 탁 트이는 전망 좋은 시루봉에 오른다...(14:53)

 

江陵-四柱山

강릉 고을을 떠받치고 있는 네 개의 산봉우리.

모산봉, 월대산, 땅재봉, 시루봉인데, 이 4개의 산봉우리가 강릉을 떠받치고 있다.

강릉 시내로 흐르는 남대천을 기준으로 하여 내 남쪽에 2개, 내 북쪽에 2개가 있는데,

남쪽에는 모산봉(母山峰)과 월대산(月帶山)이 있고, 북쪽에는 땅재봉(堂齋峰)과 시루봉(甑峰)이 있다.

이 산봉우리들은 마름모꼴로 버티고 있어 강릉의 터를 단단히 다져 주는 역할을 한다.

 

모산봉

장현동에 있다. 밥그릇을 엎어놓은 것처럼 생겼다 해서 밥봉, 볏짚을 쌓아 놓은 것 같다 해서 노적봉,

인재가 많이 나게 한다 해서 문필봉이라고도 한다. 

모산봉은 강릉의 안산이자 명산이어서 조선중기 중종 때 강릉부사인 한급(韓汲)이

강릉에 큰 인물이 나는 것을 두려워하여 꼭대기를 세 자 세 치 깎아내렸다고 한다.

월대산

두산동 남대천 하류 남쪽에 있다. 초저녁 보름달이 떴을 때

강릉대도호부 관아 동헌(東軒)에서 달을 바라보면 달이 산허리 걸린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월대산은 모산봉에서 동북쪽으로 내려온 줄기 가운데 제일 높은 봉으로 봉화터가 있으며,

청량과 하평들, 젠주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젠주라는 뜻은 강릉 송정동 남대천 하구의 넓은 뜰을 부르던 옛 이름)

땅재봉

유천동에 있다. 옛날 이 봉우리에 당을 지어 놓고 당제를 올렸다고 하여 생긴 이름인데,

당재가 있어 당재봉이 변해 땅재봉으로 되었다.

땅재봉은 삿갓을 엎어놓은 것처럼 생겼으며, 동서남북으로 뻗어 내린 네 줄기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또 땅재봉에는 좋은 묏자리가 많아 인근 마을사람들이 밤에 몰래 주검을 가매장하기도 했다고 한다.

시루봉[甑峰]

강릉시 저동에 있는 산의 봉우리.

시루봉[甑峰]은 그 생김새가 떡을 찌는 시루를 엎어 놓은 것처럼 생겨 붙여진 이름이다.

경포지역에서 제일 높은 봉으로 서쪽에는 태장봉이 있고,

동쪽으로 이어진 줄기 끝에는 경포대와 경포호, 경호정, 금란정, 방해정 등 정자가 있다.

시루봉은 경포의 4주산, 강릉의 4주산 가운데 하나이고,

경포팔경 가운데 하나인  저녁 무렵 시루봉을 붉게 물들인

저녁 햇살의 모습이 아름답다고 하여, ‘증봉낙조’(甑峰落照)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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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은 대관령의 동쪽이라고 붙여진 명칭이라 한다.

그러니까 대관령 동쪽에 있는 손꼽히는 명승지 8곳을 관동8경이라 한다. 
통천의 총석정(叢石亭), 고성의 청간정(淸澗亭), 고성의 삼일포(三日浦) 강릉의 경포대(鏡浦臺),

삼척의 죽서루(竹西樓), 양양의 낙산사(洛山寺), 울진의 망양정(望洋亭),  평해(平海)의 월송정(越松亭)을 말하는데,

월송정 대신 흡곡(歙谷)의 시중대(侍中臺)를 넣기도 한다. 
망양정과 월송정은 경상북도에 있고, 삼일포와 총석정은 북한지역이다.

관동별곡은 조선 선조(宣祖) 때, 정철(鄭澈)이 관동팔경과 금강산 일대의 산수미(山水美)를 읊은 가사이다. 
관동에 관동8경이 있다면 경포에는 "경포 8경'이 있다.

 

경포8경 (鏡浦八景)

관동팔경(關東八景) 중의 하나인 경포대(鏡浦臺)는 실상 관동팔경 중 제1경으로 꼽히는 곳인데

다시 경포호수를 중심으로, 주변에는 수많은 정자(亭子)들이 들어서 있다.

이곳의 아름다운 경관을 경포팔경(鏡浦八景)이라고 하며 강원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이곳의 빼어난 경관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는데 누구의 작품인지 확인하기가 어렵다.
1.녹두일출 (菉荳日出)
   녹두정에서 바라보는 동해의 일출 
2.죽도명월 (竹島明月) 
   호수 동쪽에 있는 섬모양의 작은 산으로서 지금의 현대호텔 자리는 옛날에 산죽이 무성하였다고 한다.

   동쪽 수평선 넘어 솟아오르는 보름 달빛이 죽도의 대나무 사이를 뚫고

   호수에 비칠 때 일어나는 그림 같은 장관을 죽도명월이라 하였다. . 
3.강문어화 (江門漁火)  
   강문은 경포대에서 동쪽 호수 하구에 있는 작은 마을로 밤에 경포대에서 강문 쪽 바다를 건너다보면,

   오징어 잡는 고기배의 불빛  이 바다와 호수에 영도되는 아름다운 광경을 말한다. 
4.초당취연 (草堂炊煙)
   초당은 호수의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서 서산 시루봉에 해가 질 무렵,

   집집마다 저녁을 지을 때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연기가 노을에 물들어 

   평화로운 농촌을 연상케 하는데, 그 평화로운 아름다움을 말한 것이다. 
5.홍장야우 (紅粧夜雨)
   홍장은 조선 초기에 석간 조운흘 부사가 강릉에 있을 때, 기녀이다.

   어느 날 감찰사가 강릉을 순방했을 때, 부사는 호수에다 배를 띄어놓고

   홍장으로 하여금 가야금을 켜고 감찰사를 극진히 대접했다.

   감찰사의 사랑을 흠뻑 받은 홍장은 뒷날 다시 오겠다고 언약을 남기고 떠난 감찰사를

   호숫가 바위에 앉아 넋을 잃고 기다렸으나 한번 가신 님은 소식이 없다.  
   그러던 어느날 자욱한 안개사이로 감찰사의 환상이 나타나 홍장을 부른다.

   홍장은 너무나 반가운 나머지 그쪽으로 달려가다 호수에 빠져 죽었단다.

   이 때부터 이 바위를 홍장암이라 부른다고 한다. 
6.중봉낙조 (甑峯落照)
   경포대 북서쪽에 있는 시루봉은 그 봉우리 모양이 시루와 비슷하다 하여 시루봉이라 하며 

   해가 서산마루에 기울어질 무렵, 경포 호수에 반영되는 일몰의 낙조가 잔 물결에 부서지는 아름다운 광경을 말한다.  
7.환선취적 (喚仙吹篴)
   시루봉의 상선봉에 신라 선인들이 풍류를 즐기며 바둑을 놓고 놀던 곳이 있었는데

   고요한날 밝은 밤이면 어디서부터인가 구슬픈 피리 소리가 바람결에 은은히 들려왔다고 한다.
   지금도 고요한 밤이면 옛 신선들이 바둑 놓고 피리 부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8.한송모종(寒松暮鐘)
   한송정은 지금의 비행장 동쪽, 녹두정이라 불렸던 이 정자는 화랑도들의 수양의 도장으로 지었던 것으로

   신라 불교의 중흥기에 한송정에서 해질 무렵 치는 종소리가 경호의 잔물결을 타고 신선이 놀던

   경포대까지 은은히 들려오던 옛 정취를 회상한 것이다. 

시루봉에서 바라본 경포호와 바다...

스카이베이 호텔...

미세 먼지로 깨끗하지는 않지만.. 그나마 산그리메를 희미하게 볼 수 있었다

아름답던 소나무도 불에 타... 잔해(殘骸)라도 보존하려고  노력한 흔적에 그저 안타까움만....

전충사 全忠祠

고려말 충신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영정(影幀)을 봉안한 사당.

사당에 봉안된 영정은 1969년 용인군 모현면 능원리 종가 인근에 있던

충렬서원(忠烈書院)에 봉향 중인 진영을 서울대학교 서세옥(徐細鈺) 교수가 모사한 것이다.

개성 숭양서원에서 모사한 영정은 퇴색되어 환봉(還封)하였다.

1934년 후손 정기용(鄭起鎔)이 개성 숭양서원(崧陽書院)에서 진영(眞影)을 모사(模寫)하여 

강릉시 왕산면 왕산리 큰골에 사우를 건립하고 30여 년 간 사림과 함께 봉향 다례를 행했다.

그러나 이 지역이 산간오지로 교통이 불편하여 사림의 왕래가 곤란하고,

또 병화(兵禍) 우려 지역이기에 이건이 불가피한 실정에 있었다.

1967년 강릉유도회장이던 후손 정주교(鄭冑敎)의 주선으로 사림 및 후손들과 협의 하에

1968년 강릉시장 김남형(金南亨)을 영당이건추진위원회(影堂移建推進委員會) 위원장으로 선정하고

사림과 후손들이 성금을 모아 지금의 자리로 이건 하였다.

1969년 4월 16일 박정희 대통령이 비서관 손석원(孫錫源)을 파견하여

봉안고축문(奉安告祝文)을 고하고 사당을 전충사(全忠祠)라 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형태인 전충사가 정면에 있다. 입구는 맞배지붕 형태의 삼문이며 담장이 둘러져 있다.

전충사 솟을대문에 ‘상도문(尙道門)’이란 현판과 전충사 전면 4개 기둥에 주련(柱聯)이 걸려 있다.

강릉 지역 유림과 후손들의 협의에 의하여 사우가 운영되고, 재정은 영일정 씨 강릉지구종친회에서 담당하고 있다.

제향일(祭享日)은 매년 음력 4월 상정일(上丁日)이다.

경포대( 경포대는 고려시대의 문화를 보여주고 있는 누각으로 정면 6칸, 측면 5칸, 기둥 32주로 구성되어 있다.)

경포대와 경포호 (鏡浦臺와 鏡浦湖)

경포호는 강릉시 저동에 있는 천연 호수로, 호숫물이 거울과 같이 맑다고 하여 경호(鏡湖)라고도 하였다.

강릉 홍제동에서부터 흐르는 죽일천, 성산면 위촌리에서 흐르는 경포천,

성산면 송암리에서 흐르는 운정천의 물줄기가 모여 만들어졌다.

강릉의 대표적인 승경으로 경포호 주위에는 경포대 외에도 활래정, 해운정, 금란정, 방해정, 호해정,

상영정, 창랑정, 경호정, 석란정, 취영정, 환선정과 같은 정자들이 있다.

경포대는 영동지방 팔경 중에서도 제일경으로 꼽는 경포호수의 뛰어난 자연경관과 잘 어울리는 곳에 있다.

안축이 지은 「경포대기」에 따르면 고려 충숙왕 13년(1326) 안렴사 박숙에 의해 처음 창건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경포대가 강릉부 동북 쪽 10리에 있고

옆에는 봉우리가 있으며 봉우리 위에 정자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1508년(중종 3) 강릉부사 한급에 의해서 옛터에서 지금의 장소로 이건 되었다.

따라서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은 이전하기 전, 현재 방해정의 뒷산인 시루봉에 있을 때의 모습을 설명한 것이다.

1524년(중종 19)에는 화재로 소실되어 강릉부사 박광영이 중수하였으며,

1628년(인조 6)에는 강릉부사 이명준이 온돌과 양실을 철거하였다고 한다.

이후로도 여러 차례 중수하였으며, 1897년(광무 1)에는 강릉군수 정헌시가 득월헌과 후선함을 설치하였다.

현재의 골격은 1628년 중수 때의 모습으로 추정된다.

 

천연 호수인 강릉 경포호는 그 자체로서 보존 가치가 높은 명승이며,

여기에 세워진 경포대는 수백 년 간 문예의 제제가 되어온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건립과 중수 기록을 통해서 볼 때 경포대는 단순히 경치를 관람하고 풍악을 즐기기 위한 일반 누각이나

개인이나 문중의 독서 및 후학 양성을 위한 정자와는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이후로는 대부분의 중수가 강릉부사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

지방관의 안정적인 지역 통치를 위한 관영 누각으로 운영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많은 시인 묵객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유학자들의 심신 수련과

수려한 경관을 즐기며 감상하는 유식(遊息)의 용도로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1628년에는 온실과 양실을 철거하였는데, 이때부터 정자의 기능은 사라지고 누와 대의 기능이 강조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경포대는 오랫동안 변천해 오면서 기능과 용도가 다양하게 변화해 왔고,

건축적으로는 뛰어난 조형성을 보여주고 있다.

강릉 경포대와 경포호는 2013년 12월 30일 명승으로 지정되었다.

 

* 경포호수 주변에 흩어져 있는 정자각들

①경포대(鏡浦臺:1326년 건립) - 경포호숫가의 제1 누대(樓臺)<국가 보물 2046호>

②해운정(海雲亭:1520년 건립) - 강릉시 운정길<국가 보물 183호>

③환선정(喚仙亭:1582년 건립) - 경포호 남쪽 언덕 위

④호해정(湖海亭:1754년 건립) - 강릉시 저동, 경포호의 북쪽 언덕 위<강원 유형문화재 62호>

⑤활래정(活來亭) - 선교장(船橋莊:1815년 건립) 내에 있는 정자각

⑥방해정(放海亭:1859년 건립) - 강릉시 저동(2023년 4월, 화재로 일부 손실)<강원 유형문화재 50호>

⑦상영정(觴詠亭:1886년 건립) - 강릉시 경포로371번길 53(2023년 4월, 화재로 전소)

⑧금란정(金蘭亭/<舊>梅鶴亭:1889년 건립) - 강릉시 경포로371번길 57<강원 유형문화재 5호>

⑨취영정(聚瀛亭:1893년 건립) - 강릉시 해안로406번길(강문)

(10)경호정(鏡湖亭:1927년 건립) - 경포로371번길 49

(11)월파정(月波亭:1958년 건립) - 강릉시 초당동 549, 경포호수 내 섬에 있는 정자각

(12)창랑정(滄浪亭:1962년 건립) - 경포호 서쪽 해변

※석란정(石蘭亭:1956년 건립) - 2017년 화재로 전소(소방관 2명 순직)

※홍장암(紅粧巖) - 경포호숫가에 있는 바위<홍장고사가 얽혀있는 바위>

※한송정(寒松亭 址) - 강동면 하시동에 있던 정자(우리나라 最古의 다도유적지<茶道遺蹟地>)

2017년 화재로 석란정(石蘭亭)이 완전소실되었는데,

2023, 4월 또다시 경포호수 주변의 산불로 상영정(觴詠亭)은 전소(全燒),

방해정(放海亭)은 일부 소실(燒失)되었다니 가슴 아픈 일이다.

호수를 바라보며 그녀를 생각하는 고독한 아기별님...(여기서 그녀는 사임당, 허초희가 아니고 울트라님이다...^^)

수정초님 & 블랙빈님

경포호 쉼터에서 마지막 휴식...(15:29)

경포 가시연습지를 지나간다...(15:40)

경포습지 조성으로 가시연꽃 등 다양한 희귀 식물과 동물들을 볼 수 있다.

주위에는 강릉녹색도시체험센터, 석호생태관, 경포아쿠아리움등이 있다.

예전엔 나룻배를 타고 건넜었는데...  배는 묶여 있고 이젠 흔들 다리가 설치되어 있다.

신사임당 종착지 허난설헌 생가 도착...(15:56)

 

*신사임당과 허난설헌
조선시대 양대(兩大) 여류 문필가라면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을 꼽지 않을 수 없다.
공교롭게도 걸출한 두 여성은 고향이 같다.
강원 강릉으로 모두 토호집안이다. 두 집이 멀리 떨어진 것도 아니다.
그러나 신사임당이 60년 먼저 태어나고 허난설헌은 사임당 사후(死後)에 태어났다.
두 여걸의 닮은 점은 많지만, 한평생 살아온 인생은 하늘과 땅으로 갈라졌다.
경포호 뒤쪽에 자리 잡은 큰 기와집은 당대의 문필가요,
경상도 관찰사였던 초당 허엽의 보금자리였다. 초당두부도 허엽의 호에서 유래했다.
신사임당도 허난설헌도 어릴 때부터 천재성을 드러내, 제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혼기가 찼을 때, 두 천재의 아버지 판단이 그들의 일생을 극과 극으로 갈라놓았다.
신사임당의 아버지는 아예 가문도 학식도 한참 모자라는 데릴사위를 데려와,
딸이 마음껏 자신의 재능을 친정집에서 눈치 보지 않고 펼치게 했지만,
허난설헌의 아버지는 문필에 능한 자기 딸을 5대(代)가 문과에 급제한 안동 김 씨네 명문가문에 시집보내기로 했다.
문필가 집안에 문필가 며느리가 들어오면 귀여움을 받으리라는 생각이었다.
그것은 완전히 오판이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허난설헌의 비극은 여기서 시작됐다.
시대의 조류도 한몫했다. 고려시대부터 조선 전반기까지 내려오던 혼례풍습인,
'남귀여가(男歸女家)’는 남자가 여자 집에 의탁한다는 뜻으로,
데릴사위로 신랑이 신부집에 들어가 사는 것이다.
신사임당이 그랬다. 그랬던 풍습이,
조선 후반기로 넘어오며 ‘친영례(親迎禮·신랑이 신부집에 가서 신부를 데리고 와

본가에서 혼례를 올리는 방식)’로 바뀌었으니, 혼례를 치른 신부는 당장 시집으로 들어가 살아야 했다.
혼례풍습이 달라진 조선 전반기와 후반기 바로 그 시점이

60년 앞서 태어난 신사임당과 후에 태어난 허난설헌의 인생을 갈라놓은 것이다.
허난설헌은 운이 나쁘게도 친영례의 첫 세대가 됐다.
열다섯 어린 새 신부 허난설헌이 김성립에게 시집가 남자도 하기 어려운 한시(漢詩)를 지어 일필휘지로 써 내려가니,
문필가 집안에서 예뻐하리라는 것은 친정아버지 허엽만의 생각이었다.
시집 식구들의 눈초리는 서릿발처럼 싸늘했다.
계속 과거에 떨어지는 못난 신랑 김성립은 주눅이 들어 집을 겉돌기 시작했고,
과거(科擧) 준비하는 선비들의 합숙소인 접(接)에서 눈을 붙인다 해놓고 사실은 기방 출입이 잦았다.
시어머니는 제 아들이 마누라 기에 눌려 과거에 낙방한다고 입을 놀렸다.
허난설헌의 고난과 슬픔을 달래줄 수 있는 것은 시작(詩作)밖에 없었다.
시댁 식구들이 잠든 깊은 밤,
피를 토하는 소쩍새 울음을 삼키며 호롱불 아래서 붓을 휘둘렀다.
허엽은 본처와 사별하고 재취(再娶)를 맞아 2남 1녀를 뒀다.
오빠가 명나라 사신이었던 허봉, 가운데가 허난설헌, 남동생이 『홍길동전』을 한글로 쓴 허균이다.
삼 남매는 후처의 자식으로 과거에도 합격하고 등용돼 나라의 녹도 먹었지만, 서자에 대한 유교사회의 차별에 분노했다.
허균은 양반을 능멸하는 소설 『홍길동전』을 써서 양반들의 횡포에 짓눌려 살던 무지렁이들의 가슴을 뻥 뚫어줬다.
비록 훗날 그는 능지처참을 당했지만 말이다.
1580년, 경상관찰사를 마치고 귀경하던 아버지 허엽이, 상주에서 쓰러져 객사했다.
얼마 후 허난설헌의 어린 딸이 죽고, 이듬해 아들도 죽었다. 경기 광릉 땅에 두 남매를 묻었다.
아버지를 여의고 자식까지 모두 잃고 구곡간장(九曲肝腸)이 끊어지는 슬픔을 느끼다가, 배 속에 잉태한 자식도 떠나보냈다.
몇 해 후,
허난설헌이 부모처럼 기대던 오빠 허봉이 관직에서 물러나 방황하며 술로 세월을 보내다 강원도에서 객사했다.
"아름다운 부용꽃 스물일곱 송이 붉게 떨어지니 서릿발이 차갑구나."
허난설헌은 자신의 죽음을 예견했을까. 이 시를 짓고 이듬해 천재는 요절했다.
그때 그의 나이 스물일곱! 그는 죽기 전에 한평생 세 가지 한(恨)을 피력했다.
"조선 땅에서 태어난 것, 여자로 태어난 것, 남편을 잘못 만난 것."
그녀는 자기가 지은 시작(詩作)을 모두 불태우라고 유언했다.
동생 허균은 친정집에 숨겨져 있던 유작(遺作)과 불태워진 시를 기억으로 더듬어 살려내 허난설헌 시집을 발간했다.
명나라 사신이 조선에 왔다가, 허균으로부터 누이의 시집을 보고 북경으로 돌아가 『조선시 선집』을 발간하자,
허난설헌의 시는 폭발적 인기를 얻었다.
당시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우리나라로 역수입돼 세상에 알려졌다.

 

*

신사임당, 허난설헌 그들을 생각하며 봄기운 완연한 그리운 그 길을...

당신들과 함께여서 즐겁고 행복하게 걸었습니다.

구간 지기님과  함께한 바우님들 대단히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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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테라(강원/강릉) | 작성시간 26.03.22 선두에 세워 주셔서 감사합니다~ㅋ
    늘 후미에 있다보니
    님들의 뒷태만 담아요
    날쌘돌이 걷자님 덕분에
    앞태 (뒷태는 덤)님들의 표정도 읽을 수 있어 사진 보는 재미가
    아주 쏠쏠해요~^^

    수고 많으셨고,감사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걷자(서울/강릉)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3.23 앞태님들?....갑자기 웃음이...ㅎ
    나는요..테라님이 있어 뒷태님들 모습을 볼 수 있어 참 좋다는...
    (그리고 덕분에 내 모습도 담아 주어 고맙다는...)
    좋은 날에 함께 걸어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댓글 이모티콘
  • 작성자사무국장 | 작성시간 26.03.23 꽉~찬 지난주말 후기에 눈과 귀가 즐겁습니다. 봄이 가득합니다.수고해주신 덕분에 감사히 즐감합니다 ~^^ 괜찮은 한주간 보내세요~^^
  • 답댓글 작성자걷자(서울/강릉)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3.23 사람 기분 좋게 만드는 국땅님...이젠 국땅님 얼굴만 봐도 즐겁다는....
    나 보고 괜찮은 한 주간 보내라고 하시는데....
    나는 국땅에게 외칩니다.....억수로~무쟈게 행복 한 주간 되시길....^^
  • 작성자허~브 (강릉/운영자) | 작성시간 26.03.24 바우님들의 표정만 읽어도
    그날의 분위기가 어땠는지
    짐작이 갑니다 ^^

    아직 꽃 놀이 시작도 안했는데,,
    벌써 더위를 걱정하게 되네요~
    이번 여행에도 바우길 홍보는 필수!!

    벌써 4월에 걸으러 오시겠다는 분들이 ㅎㅎ

    수고 많으셨습니다~
    바우길에서 반갑게 뵐께요~걷자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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