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의 문화유적지 ② (용흥궁)
강화도령 철종이 19세까지 살았던 집
용흥궁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에 있는 조선 후기 철종(1831∼1863)이 왕위에 오르기 전 19세까지 살던 집입니다. 철종은 1850년에 즉위하여 1863년에 세상을 떠난 조선의 제25대 왕입니다. 서민으로 지내던 어린 시절을 생각하여 백성들을 위한 정치에 힘을 썼지만, 당시 주위의 간신들의 방해와 자신의 병으로 인해 정치를 다하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신 임금입니다.
<아래 보이는 기와집들이 용흥궁입니다.>
<용흥궁은 이런 골목길로 갑니다.>
조선시대에 국왕의 장자로 태어나 정상법통으로 왕세자가 된 게 아니라 다른 방법이나 사정으로 임금으로 추대된 사람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을 잠저(潛邸)라고 합니다. ‘궁(宮)’이라고 하는 것은 왕이나 왕족이 살았던 곳을 단순히 일컫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서울의 운현궁은 흥선대원군의 궁도 되지만 그의 아들인 조선 제26대 국왕 고종의 잠저이기도 한 셈입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잠저로는 태조의 함흥 본궁과 개성 경덕궁, 인조의 저경궁과 어의궁, 영조의 창의궁 등이 있습니다.
대개 잠저는 왕위에 오른 뒤에 다시 짓습니다. 용흥궁도 원래는 초가였으나, 1853년(철종 4)에 강화 유수 정기세(鄭基世)가 기와집으로 바꾸어 개축했다고 합니다. 이후 고종 광무 7년(1903)에 청안군 이재순(李載純)이 중건하였고, 이후 세월이 흘러 비바람에 헐어진 것을 1974년에 보수를 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용흥궁은 1995년 3월 1일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0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강화경찰서 왼쪽 담 옆길을 골목을 따라 70m 정도 서쪽으로 들어가면 오른쪽으로 보이는 기와집이 바로 용흥궁입니다. 좁은 골목 안에 대문을 세우고 행랑채를 둔 용흥궁은 창덕궁의 연경당(演慶堂)이나 낙선재(樂善齋)처럼 살림집 유형에 따라 지어져 소박하고 순수한 느낌이 드는 곳입니다.
‘용흥궁(龍興宮)’이라는 현판 아래 있는 대문을 통과하면 행랑채를 마주하고 안채가 있습니다. 돌계단을 올라가면 사랑채가 있으며, 안채와 사랑채 가까이에 우물이 있습니다.
사랑채의 오른편 계단을 올라가면 작은 비각 안에 ‘철종잠저구기(哲宗潛邸舊基)'라는 글이 적혀 있습니다. 철종이 머물던 곳이라는 표시입니다. 소박한 농사꾼이던 이원범(철종의 원래 이름)이 거주하던 곳이라 규모도 작고 근처의 집들과 다닥다닥 붙어 있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유적은 철종이 살았던 옛 집임을 표시하는 비석과 비각을 비롯하여, 내전 l동, 외전 1동, 별전 1동 등이 있습니다.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에 지붕을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홑처마 주심포 양식입니다.
내전은 앞면 7칸, 측면 5칸이며 건평은 90㎡이며. 별전은 앞면 6칸, 측면 2칸인 ‘ㄱ’자형 집으로 건평이 95㎡이라고 합니다. 비각은 정사각형으로 앞면과 측면이 각각 2.5m로 넓이가 약 6㎡입니다. 별전에는 마루 앞으로 작은 정원이 있고, 별전 오른쪽에는 조금 더 큰 규모의 정원이 있으나 화초는 없었습니다.
궁이라고 불리기에는 너무 소박한 장소지만, 건물 내부로 들어가면 마음이 푸근하고, 차분해 지는 것이 초가을 따스한 햇볕을 받으면서 건물 마루에 앉아 책을 읽거나 사색을 하고 있으면 딱 좋을 듯한 정감이 서린 곳입니다. 철종이 머물러 있었을 때는 지금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철종에 대해서는 후세에 왕답지 못한 왕, 어리석은 왕으로도 부르고 있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사도 세자의 아들이며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의 손자인 철종의 기구한 일생은 당쟁과 세도정치에 의해 귀머거리, 벙어리가 되어야 했던 왕실가족들의 비운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안동 김씨들은 세도정치를 하면서 지속적으로 자신들을 적대시하는 왕손들을 죽였는데 헌종이 죽었을 때 6촌 이내의 왕손이 한 명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때 포착된 것이 바로 철종인 강화도령 이원범입니다. 왕실 족보 상 이름은 이변(李昪)이었지만 민간에서 그냥 부르던 이름은 이원범으로 사도세자의 직계 후손입니다.
대대로 역모에 연루되어 되어 고초를 겪었던 원범의 아버지 전계군은 은언군의 셋째 아들로 유배가 풀리면 서울로 들어오고 이상한 소문이 들리면 재빨리 강화도로 피신하는 등 서울의 움직임에 따라 불안한 세월을 보내다가 강화도에서 염씨 부인을 만나 세 아들을 두게 되는데 막내가 이원범으로 강화도령이라고도 불리고 있습니다.
●철종은 누구인가?
조선 제 25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1849년부터 1863년까지 재위했다. 이름은 ‘변’이고 초명은 원범(元範), 자는 도승(道升), 호는 대용재(大勇齋).
<왼쪽 사진은 용흥궁 안에 철종이 살았다는 ‘철종잠저구기(哲宗潛邸舊基)'라는 글이 적혀 있는 비석>
정조의 아우 은언군(恩彦君)의 손자로,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과 용성부대부인(龍城府大夫人) 염씨(廉氏)사이의 셋째아들이다. 당시 영조의 혈손으로는 헌종과 원범 두 사람뿐이었다. 1849년 6월 6일 헌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純祖妃, 金祖淳의 딸)의 명으로, 정조의 손자, 순조의 아들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때 나이 19세였으며, 학문과는 거리가 먼 농군으로서, 1844년(헌종 10) 형 회평군 명(懷平君 明)의 옥사로 가족과 함께 강화도에 유배되어 있었다. 그런데 별안간 명을 받아 봉영의식(奉迎儀式)을 행한 뒤 6월 8일 덕완군(德完君)에 봉해지고, 이튿날인 6월 9일 창덕궁 희정당(熙政堂)에서 관례(冠禮)를 행한 뒤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하였다.
나이가 어리고 농경을 하다가 갑자기 왕이 되었으므로 처음에는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1851년(철종 2) 9월에는 대왕대비의 근친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왕비(明純王后)로 맞았다. 그뒤 김문근이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이 되어 국구로서 왕을 돕게 되니 순조 때부터 시작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또다시 계속된 셈이었다.
철종은 1852년부터 친정을 하였는데, 이듬해 봄에는 관서지방의 기근대책으로 선혜청전(宣惠廳錢) 5만냥과 사역원삼포세(詞譯院蔘包稅) 6만냥을 진대(賑貸)하게 하였고, 또 그해 여름에 한재가 심하자 재물과 곡식이 없어 구활하지 못하는 실정을 안타까이 여겨 재용(財用)의 절약과 탐묵(貪墨)의 징벌을 엄명하기도 하였다.
1856년 봄에는 화재를 입은 약 1천호의 여주의 민가에 은자(銀子)와 단목(丹木)을 내려주어 구활하게 하였고 함흥의 화재민에게도 3천냥을 지급하였으며, 이해 7월에는 영남의 수재지역에 내탕금 2천냥, 단목 2천근, 호초(胡椒) 2백근을 내려주어 구제하게 하는 등 빈민구호책에 적극성을 보였다.
그러나 정치의 실권은 안동김씨의 일족에 의하여 좌우되었다. 이 때문에 삼정(三政:田政·軍政·還穀)의 문란이 더욱 심해지고 탐관오리가 횡횡하여 백성들의 생활이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농민들은 마침내 1862년 봄 진주민란을 시작으로 하여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여러 곳에서 민란을 일으켰다.
이에 철종은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이라는 임시 특별기구를 설치하고, 민란의 원인이 된 삼정구폐(三政救弊)를 위한 정책을 수립, 시행하게 하는 한편, 모든 관료에게 그 방책을 강구하여 올리게 하는 등 민란수습에 진력하였다. 그러나 뿌리 깊은 세도의 굴레를 벗어나 제대로 정치를 펴나갈 수 없었다. 이와같은 사회현상에서 최제우(崔濟愚)가 동학(東學)을 창도하여 사상운동을 전개, 확산시키자 이를 탄압, 교주 최제우를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인다.’는 죄를 씌워 처형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863년 12월 8일 재위 14년 만에 33세를 일기로 죽고 말았다. 수용 4본이 천한전(天漢殿)에 봉안되었으며, 혈육으로는 궁인 범씨(范氏)소생의 영혜옹주(永惠翁主)하나가 있어 금릉위(錦陵尉) 박영효(朴泳孝)에게 출가하였을 뿐 후사가 없었다. 1865년(고종 1) 4월 7일 경기도 고양의 희릉(禧陵) 오른편 언덕에 예장되고, 능호를 예릉(睿陵)이라 하였다. 시호는 문현 무성 헌인 영효(文顯武成獻仁英孝)이다.
<참고>
*용흥궁 주변에는 넓고 깔끔하게 잘 정돈된 ‘용흥궁 공원’이 있어 이곳에 주차가 가능합니다.
*주변에는 ‘성공회 강화성당’과 ‘강화문학관’ ‘고려궁지’가 있어 함께 둘러보기 좋습니다.
*용흥궁과 성공회 강화성당은 별도의 입장료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