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23일
미사 때 강론하면서 또 외부에 나가 강의하면서 항상 느끼는 것은 ‘말하기가 어렵다.’라는 것입니다. 사제로 25년 이상을 살았으니, 이제는 능숙할 때도 되지 않을까 싶지만, 여전히 어렵고 준비할 것도 참 많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어느 신부가 요즘 젊은 신부들의 강론이 형편없다는 식의 말을 합니다. 내용도 부족하고 어디선가 짜깁기 한 것이라고 평가절하합니다.
이 신부의 말을 들으면서 곧바로 든 생각은 ‘자기는 강론을 잘한다고 생각하나?’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신부에 대한 신자들의 강론에 대한 평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습니다. 그냥 평범합니다. 그러나 본인이 생각하기에 자기는 제대로 하고 있고, 다른 신부가 강론을 잘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자만이 가득합니다. 운전자의 90%는 자기 운전 솜씨가 평균보다 낫다고 믿으며, 대학교수의 94%가 자기 강의 실력이 평균보다 높다고 생각합니다. 사업을 시작하는 사람의 90%는 반드시 성공하리라 생각하는 것 역시 스스로 과대 포장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겸손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자기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자기 부족함을 볼 수 있어야 더 나아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는 잘하고 있고 잘될 것이라는 생각만 있으면, 안 좋은 결과에 남 탓, 환경 탓만 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겸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보다 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주님의 뜻을 기억한다면 먼저 겸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겸손 안에서만 하느님의 일이 완성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세례자 요한의 탄생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하느님의 일을 믿지 않아서 벙어리가 되고 말지요. 그런데 세례자 요한의 할례식에서 혀가 풀리고 말을 하기 시작할 수 있게 됩니다. 관습대로 아기 이름을 정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기 때문이었습니다. 자기 뜻을 낮추는 겸손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드러날 수 있었습니다.
혀가 풀려 말을 할 수 있게 된 후에도 제일 먼저 한 것은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것이 우리의 첫 번째 일이 되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겸손 안에서 하느님의 일이 완성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나만을 높이고, 주님을 오히려 낮추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의 명언: 만사에 너그러움이 따르면 그 복이 저절로 두터워진다(공자).
사진설명: 세례자 요한의 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