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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예수 ( 1 )

작성자구유|작성시간15.04.01|조회수82 목록 댓글 0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예수 (요한 13, 1-17)

 

 요 며칠간 우리는 자신을 남김없이 바치시는 예수의 행위에서 하느님의 영광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묵상하는 중이다. 지상에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이 영광스러운 사업이 하느님을 온전히 계시하면서 또한 인간의 존재가 정말 무엇인지도 충만하게 계시해준다. 수난의 서곡이 되는 이 복음구절이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것도 바로 그런 것이다. 복음의 이 대목이 요한에게는 극히 중요한 비중을 갖는데 성체성사의 제정에 관한 언급을 대치시킬 정도이다. 성체성사의 제정에 관해서는 요한도 잘 알고 있을 뿐더러 다른 대목에서 크게 강조하고 있고 그 의의를 이 대목에서 부각시키고자 하고 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이 대목이 중요한 것은 어느 면에서 성체성사의 제정과 상응하며 그 의의를 가르치기 때문만이 아니라, 요한복음서 후반부의 서문이 되는 까닭이기도 하다.

 

 요한복음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   -   -  이 대목에서부터 복음사가는 어조를 달리한다. 새롭고 감정이 풍부한 어조를 쓴다. 예수와 그분의 제자들 사이의 대화는 신뢰 깊고 친밀한 대화가 된다. 예수님이 베일을 벗고 당신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시며, 전반부의 무겁고도 어두운 분위기에서 일어났던 신랄한 언쟁들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전반부는 정말 충돌과 논쟁과 예수께 반대하는 적대행위로 점철된 순간들이었다. 이제는 벗들 사이의 기나긴 대화의 분위기가 바뀌어, 간간이 제자들의 오해로 그것이 끊기지만 그때마다 예수님이 다정하게 그것을 바로잡아 주신다.

 

 성서의 이 대목은 해석하기가 상당히 힘들다. 다양한 주제가 엇갈려 있어 여러 각도에서 생각할 수 있는 까닭이다. 문장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거나 그 말이 왜 나오는지 모르는 글귀가 가끔 있다. 예를 들어 당장 4 절에 만찬을 시작하시자마자 즉 식사 도중에 발을 씻는 예식에 들어가신 것도 납득이 어렵다. 보통으로는 식사를 시작하기 한참 전에 이 의식이 있는 법이다. 예수의 행동은 의도적으로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려는 것처럼 보인다. 인류 역사에서 십자가가 전대미문의 스캔들이요 거북한 장애물이 되었던 것처럼, 식사 도중에 갑자기 일어난 예수의 이 행동은 예수께 대한 제자들의 사고방식을 송두리째 뒤집어엎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해석이 성서 본문에 맞는지 또는 지나치지 않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나의 해석이나 다른 해석이나 자명한 것은 아니다. 그 예로 10 절을 보자. "목욕을 한 사람은 온몸이 깨끗하니 발만 씻으면 그만이다. 너희도 그처럼 깨끗하다. 그러나 모두가 다 깨끗한 것은 아니다" 라는 말씀이 무슨 뜻이며, 왜 이 문맥에 삽입되어 있는 것일까? 이 10 절은 적어도 일곱 가지로 달리 읽을수가 있으며 사본 전승의 역사에서도 수난을 많이 겪은 구절이다.

 

 가장 간결하기로는 시나이 사본으로 "목욕을 한 사람은 씻을 필요가 없다" 라고 되어 있을 뿐 발 이야기는 삭제되고 없다. 만일 이 사본의 판독이 옳다면 내가 이하에 제시하려는 해석의 방향에 입각해서 이 대목 전체의 뜻이 분명해지는 셈이다.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요한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모든 암시를 다 포착하기가 쉽지 않다는 설명을 하기 위한 것이다. 요한의 언어는 예상하지 못하게 별안간 주제들을 제기하고 왜 바로 그 시점에서 그 언어가 튀어나오는지 짐작하기가 힘들다.

 

 여하튼간에 14 절에서는 이 성서 대목의 근본 의미가 분명하게 나타난다. "스승이며 주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 그런데 '서로 발을 씻어준다' 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초대교회는 이것을 자구적으로 받아들였고 그 흔적이 성목요일 예식에 지금도 남아 있다. 어떤 과부가 교회에 봉직할 자격이 있는지를 판별하는 기준 가운데 '성도들의 발을 씻어주었는지' 즉 이 봉사직무를 열심히 수행해왔는지를 묻는 항목이 있었다.

 

 여기서 한 걸음 나아가 해석을 한다면 이 봉사는 약간 비천하고 달갑지 않는 모든 봉사들을 한데 요약한 것이라고 보겠다. 내게는 이 해석이 성서 본문의 가장 정확한 의미로 보인다. 먼저, 예수님이 이 행동을 하신 것이 단 한 번이라는 점에서, 이것은 특별한 행위이며 따라서 놀라움과 충격을 자아내는 행위였다. 예사로운 행위가 아니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계속해서 비천한 봉사를 할 처지가 아니었다. 랍비 즉 선생님으로서 명령을 내리는 입장이었다. 제자 둘을 보내어 나귀를 찾아 끌어오라고 시키시는가하면 제자들을 보내어 과월절 만찬을 차리게 하신다. 그런가 하면 루가복음 8장에 나오듯이 제자들에게 여자들이 따라다니면서 돕고 있었다. 예수님이 한 번, 그것도 상징적 의미로 이루신 그 행위에 우리 각자가 일평생 매여 있을 수는 없다. 따라서 비록 예수를 본받아 우리가 서로서로 행하는 것일지라도 이 대목의 뜻을 비천하고 불편한 봉사에 국한시키기는 힘들다. "너희에게 본을 보여준 것이다" 라는 구절을 단 한 번 하신 행위에다 국한시킬 수는 없다. 예수의 이 봉사행위는 정말 그분이 우리에게 하시려는 바가 무엇인지를 깨우쳐주기 위한 수수께끼라고 하겠다.

 

 이상으로 말한 첫번째 해석에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논거가 또 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장면에 앞서 머리말에 해당하는 구절이 두서너 구절 미리 나오는데 어떻게 보면 요한의 근본사상과 주제들이 거기에 요약되어 있다. 아버지께로부터 보냄 받으신 예수님은 아버지의 사랑을 우리 가운데 가져오셨고 이제는 아버지께로 돌아가신다는 요지이다.

 

 또 그분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소임과 권한을 전적으로 소유하고 계시며 그 전권을 가지고 우리를 '끝까지(극진히)' 사랑하셨다는 사상이다. 마침내 우리는 예수의 행위,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행위, 보통 종들에게 맡겨진 극히 비천한 행위로써도 예수님이 우리를 극진히 사랑해주셨다는 사실을 설명하기가 부족함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의 이 행위는 '예언적 표지' 또는 수수께끼이다.

 

 그분의 전 생애와 수임사명을 푸는 열쇠가 거기에 있다. 훗 날 바울로가 필립비서에서 이야기한 - 이것은 초대교회의 전례를 반영하고 있다 - '종의 신분을 취하시' 는 예수의 행위가 여기에 나타난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예수의 행위는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 아버지께서 모든 권한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종의 신분을 취하여 인간들의 필요에 전적으로 당신을 내주고 그들의 손에 당신을 온전히 맡기시는 자세, 그것 때문에 인간들의 손에서 당하시는 극단적인 결과 앞에서도 뒤로 물러서지 않으시는 자세를 가리킨다. 바로 이 수수께끼에 육화 - 생애, 수난, 죽으심과 부활 - 의 전의미(全意味) 와 성체성사의 본뜻이 담겨 있다. 우리사이에, 우리와 함께 그리고 우리를 위하시는 하느님이 되시고자 우리의 음식이 되어 우리들 손에, 우리들 처분에 전적으로 당신을 내주시는 것, 이것이 성체성사의 본뜻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행위는 계시하는 행위이다. 예수님이 하신 행동만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누구신지도 알려준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역설적인 신비와 마주치게 된다. 즉 예수님은 하느님을 인간에게 봉사하는 하느님 '처럼' 나타내신다. 그러나 만일 하느님이 우리를 섬기려는 분으로 나타나신다면, 사물의 궁긍적 의의인 로고스께서 전적으로 우리의 처분에 맡겨진 분으로 나타나신다면 우리 실존의 궁극적 의의도 여기서 함께 밝혀지게 된다. 곧 다른 이들의 처분에 전적으로 맡겨지는 그것이 우리 실존의 궁극적 의의가 된다.

 

 

 

                                                                              < 요한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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