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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사이 유다이즘 비판 2

작성자구유|작성시간20.08.26|조회수378 목록 댓글 0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 불편한 진실을 고백하기: 바리사이 유다이즘 비판 ⓶

 

2테살 3,6-10.16-18; 마태 23,27-32

연중 제21주간 수요일; 2020.8.26.; 이기우 신부

 

어제 시작한 바리사이 유다이즘 비판의 결론부터 미리 짧게 내비지자면,

그 이유는 바빌론 유배 이후에도 또 다시 그리스계 왕조가 혹독하게 유다인들의 전통적 신앙을 박해하니까,

이스라엘의 주류에 속하던 유다인들 가운데 하시딤이라 불리우는 개혁적 일파들이 유다이즘의 부흥을

외치고 나섰고 그 일환으로 율법의 회복과 탈무드와 하가다라고 불리우는 주석 작업을 추진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바리사이즘이라 불리우는 새로운 흐름이 형성되었는데,

이 흐름에 담긴 그 유다인 개혁파들의 의지가 본시 조상들로부터 내려오던 경건한 신심을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느님께서 움직이시는 자비의 은총을 기다리는 순수함을 접고,

자신들의 영민함과 율법적 열성으로 백성들을 이끌고 가려는 과잉 의욕이 나타났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 하시딤 유다인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을 종교적 율법을 확립하는 데에서 찾으려 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은 율법 지식인으로서의 사회적 지위와 기술자 직업을 지닌

중산층의 경제적 지위를 더욱 강화해 나갔습니다.

비옥한 갈릴래아 지방의 농지들을 부재지주로서 소유하기도 하고, 포도원도 소유하여 소작농들을 부리기도

했습니다.

이런 사례들이 다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합니다.

왜 그랬을까 하고 생각해 보면, 그 까닭은 자신들이 이스라엘의 개혁을

주도하기 위해서였다고 밖에는 달리 생각할 수 없습니다. 자신들의 주도권을 위해서

자신들의 지식인이라는 사회적 지위도, 기술자로서 중산층이라는 경제적 지위도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겠지요.

하느님의 주도권이 사라져버리는 결정적인 비극이 여기서 싹이 틉니다. 

 

한 마디로 그들 바리사이 유다인들은 로마 식민통치로부터 독립을 표방하면서도

또한 그들 로마 식민통치자들의 폭력을 흉내낸 이중적 위선으로 백성 위에 군림하였습니다.

십계명에 근거를 둔 율법은 길 없는 사막에서 만들어내는 길처럼, 하느님의 길로서 표현된 것일 뿐,

원초적 하느님의 길 즉 토라는 무상으로 그들을 당신 백성으로 선택해 주신 자비와 정의였습니다.

그것이 출애굽, 즉 이집트 탈출의 영성이요 파스카의 신비였습니다.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의 그 은총스런 선택을 본받으라고 가르쳐준 길이 십계명이요 그로 인한 해방의 길이 율법이었는데,

그들은 손가락만 쳐다보고 정작 그 손가락이 가리켰던 달은 보지 못한 셈. 자신들의 애국심, 율법에 대한 열성,

독립을 향한 열정이 지나쳐서 그 길을 따라오지 못한 저급한 부류와 분리되고자 바리사이라고 불리는 일도

감수하던 무리들이었던 것입니다. 

 

동양의 동아시아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유가와 도가 사이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도가의 노자가 인위를 배격하는 무위자연(無爲自然) 사상을 설파했습니다.

만약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위적인 자신들의 주도권을 배격하지 않고 도를 말한다면,

그것은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가 되어 버린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노자는 진리란 물과 같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상선약수(上善若水)입니다, 

 

하느님께로 정체성의 뿌리를 찾지 않으면, 정체성을 상실해 버리는 위기는 상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리사이 유다인들은 자신들이 주도하고자 했던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그저 역사적 선택의 주체가 하느님이셨다는 기록만으로 자부심을 찾아야 하는 숙명이 되었습니다.

이제 교회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주도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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