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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모니카, 안중근의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

작성자구유|작성시간20.08.27|조회수252 목록 댓글 0

- 불편한 진실을 고백하기 ⓷ : 어머니가 사형수 아들에게 정체성을 일깨우다

 

1코린 1,1-9; 마태 24,42-51 / 성녀 모티카 기념일; 2020.8.27.; 이기우 신부

 

  오늘은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어머니로, 이단 마니교에 빠져서 방탕한 생활을 하던

아들을 회개시키기 위하여 정성을 다하여 암브로시오 주교에게로 인도함으로써,

그리스도교 교회사 첫 천년기를 대표하는 위대한 학자로 키워낸 모니카 성녀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아우구스티노가 로마 제국의 멸망기에 대혼란을 겪던 가톨릭 교회에서 ‘신국론(神國論)’을 저술하여

서방 가톨릭교회로 하여금 변함없이 하느님 나라를 향한 여정을 지속하게끔 정체성을 확인시켜 주는 위대한

업적을 이룩했다면, 그 어머니 모니카는 아들 아우구스티노의 인간적이고 존재적인 정체성을 일깨워주었습니다. 

 

  모니카 성녀에 못지않게 조선의 민족혼을 일깨우고 조선 가톨릭의 기개를

드높인 어머니가 있었으니, 바로 안중근 토마스의 어머니인 조 마리아 여사입니다.

조 마리아 여사는 1862년 황해도 해주군의 명문가 집안에서 3남 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기가 그지없어 많은 집안에서 혼사를 논했다고 전해지고,

그 중 같은 지역에 사는 동갑내기 안태훈 선생(1862~1905)과 혼인하였습니다.

남편 안태훈 선생은 박은식과 함께 황해도 내 양대 신동으로 불렸는데 일찍이 진사시에

합격하여 ‘안진사’로 불렸으며, 개화파 박영효가 선발한 일본 유학생에 선발되기도 하였다.

평소 천주교에 관심을 두고 있었던 그는 1896년 명동성당 찾아가 천주교에 귀의하였고 어머니, 아내, 누이동생들도 세례를 받게 하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조마리아 여사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일생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조 마리아 여사와 안태훈 선생 사이에는 안중근, 안성녀, 안정근, 안공근 3남 1녀의 자녀가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독립운동에 헌신하였습니다. 장남 안중근은 일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였고,

차남 안정근은 북만주 독립군을 통합시켜 청산리전투의 기반을 확립하였습니다.

삼남 안공근은 백범 김구와 함께 한인애국단을 운영하며 윤봉길과 이봉창의 항일의거를 성사시켰고,

딸 안성녀는 안중근 의거 이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하여 손수 독립군의 군복을 만들었습니다. 

 

  대한제국이 러일전쟁 발발로 위기에 처하자 안태훈과 안중근 부자는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기로 결심했고,

조 마리아 여사는 이를 적극 지지하며, 두 부자를 지원하였습니다. 하지만 남편 안태훈 선생이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조 마리아 여사는 자식들과 함께 국내에 남아 민족 인재 양성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을 추진하였습니다.

먼저 삼흥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에 매진하는 한편 천주교 학교인 돈의학교를 인수, 제2대 교장을 역했습니다.

일제의 침략이 극에 달한 1907년,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는데, 서상돈이 이끈 국채보상운동은

전국적으로 퍼져나갔고, 조 마리아 여사도 적극 동참하였음은 물론입니다.

안중근 의사가 자청하여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를 개설하였을 때,

조마리아 여사도 국채보상 의연금을 기부하며 가족이 소지한 패물을 모두 보탰습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중국 하얼빈 역에서 한국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였습니다.

이 의거는 국내외에서 반일운동을 벌이던 한국인에게 큰 찬사를 받았고,

나아가 서구 열강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한 국제적인 사건이었습니다.

1910년 2월 14일 일제가 안중근에게 사형을 선고하자, 조 마리아 여사는 분노를 표하며

“이토가 많은 한국인을 죽였으니, 이토 한 사람을 죽인 것이 무슨 죄냐”며 일제를 강하게 질타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조 마리아는 죽음을 앞둔 안중근을 면회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조마리아 여사는 뤼순감옥으로 형을 면회하러 가는 아들들에게 한 톤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다른 마음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아마도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너의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재회하길 기대하지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이 편지와 함께 안중근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아들이 죽은 후, 조 마리아 여사는 남은 자식들과 함께 연해주로 망명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가족이란 이름에 감시와 탄압으로 독립운동을 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조 마리아를 비롯한 안중근 유족은 안창호 선생의 도움으로 연해주 크라스키노를 거쳐

러시아 동부 각지를 돌며 동포들의 독립의식과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강연활동과 방문활동을 전개했습니다.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아들 안정근이 대한적십자회의 운영을 맡기 위해 상해로 먼저 떠났고,

조 마리아 여사는 1922년 뒤따라 상해로 이주한다. 상해에 도착해서 본 임시정부의 상황은 매우 열악했습니다.

특히, 재정적 어려움은 임시정부를 이끌어 가는데 가장 큰 장애물이었습니다.

조 마리아 여사는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를 재정적으로 후원하기 위해

‘임시정부경제후원회’를 창립하고, 정위원으로서 임시정부 후원 활동에 적극 참여했습니다.

그녀는 백범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와 함께, 상해 독립운동진영의 안주인이자 어머니로 불리었습니다.

나라가 망한 민족의 위기에서 아들을 통해 민족의 정체성을 일깨운 신앙인, 조 마리아 여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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