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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종들의 종(Servus servorum Dei)

작성자구유|작성시간20.09.03|조회수890 목록 댓글 0


         


- 권위주의의 권력과 섬김의 카리스마, 그 변증법적 긴장과 갈등의 역사 

 

1코린 3,18-23; 루카 5,1-11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 2020.9.3.; 이기우 신부

 

  오늘 교회가 기억하는 인물은 그레고리오 교황입니다.

6세기 무렵 로마에서 태어나 교황직에까지 오른 그는 전례 음악, 신앙과 윤리에 관한

저술 등으로 교황직의 이정표를 세운 인물이어서 대 교황이라는 명예로운 호칭으로 불리웁니다.

그가 정비한 전례 음악도 그의 이름을 따서 ‘그레고리오 성가’라고 부를 정도로 획기적인 시도였으며,

특히 그는 교황직의 호칭에 대해서 역사상 최초로 ‘하느님의 종들의 종’이라고 자처한 인물입니다. 

 

  이 호칭은 그가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사제직무를 위임하시며 내려주신

가르침(“서로 사랑하여라”)과 행동으로 보여주신 모범(세족례)을 깊이 묵상한 결과입니다.

스승이신 분이 제자들 앞에 종처럼 무릎을 꿇고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하느님이신 분이 한낱 죄인들 앞에 종처럼 무릎을 꿇고 그런 섬김이 사랑임을 가르치셨습니다.

이 상호 섬김의 굳건한 카리스마 위에 성체성사를 세우시면서 당신을 기억하고 계승하여

성체성사를 거행하라고 위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런 상호 섬김의 길이 얼마나 크고 무거운 십자가인지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 길을 따르겠다는 제자들과 세상 끝까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혼자 힘으로 짊어지지 말고 당신과 함께 짊어지자는 말씀이셨습니다.

그 섬김의 십자가를 짊어지느라고 죽을 수 있으면, 명예심이나 자존심이나 욕심이나 지배욕이나 하는 등등의

세속적인 유혹에서 죽을 수 있으면, 그 상호 섬김의 카리스마에서 부활의 힘이 뿜어져 나오리라고 약속도 해 주셨습니다. 

 

  물론 제자들은 힘들어 했습니다. 베드로는 나서서 반박하기까지 하다가 예수님께로부터 호된 질책도 받았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는 말씀이 그때 나온 것입니다. 상호 섬김의 십자가를 거부하는 일은 사탄의 일이요,

수락하는 일은 하느님의 일입니다. 하지만 그 이후 교회의 역사에서 상호 섬김의 십자가를 짊어져야 할 때마다

예수님의 성령과 함께 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던지 베드로의 후계자들은 종종 유혹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그레고리오 교황이 공식적으로 교황직의 호칭을 ‘하느님의 종들의 종’이라고 붙인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세족례 현장에 없었지만, 그 교훈은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바오로도 아폴로도 케파도, 세상도 생명도 죽음도, 현재도 미래도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 직분이 무엇이건, 신부, 주교, 교황 등 모든 사제의 정체성은 상호 섬김의 카리스마에 달려 있습니다.

최근에 ‘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공동합의성’이라는 문서가 한글로 번역되어 나왔습니다.

이미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쇄신한 교회 정신에 포함되었던 주제인데,

워낙 그 실천이 지지부진하던 차에 교황청 국제신학위원회에서 문서화 작업을 수행했고,

그것이 이번에 번역 출판된 것입니다. 공동합의성이야말로 상호 섬김을 다른 말로 표현한 말인데,

이 문서의 내용도 내용이려니와, 이 문서가 공의회가 폐막된 지 65년이나 지난 이제야 공식 출판된다는 것 자체가

그만큼 가톨릭교회의 공식 논의구조 안에서 평신도와 수도자들과의 공동합의를 성직자들이

어려워하고 있고 껄끄럽게 느끼고 있으며 그래서 여지껏 미루어 왔다는 증거입니다. 

 

  하지만 이 문제, 즉 상호 섬김을 뜻하는 공동합의성을 가톨릭교회의

공식 논의구조 안에서 살려낼 수 있느냐 없느냐에 향후 교회의 성패가 달려있습니다.

세상이 교회를 바라볼 때에 경직된 권위주의에서 나오는 노회한 권력을 느낀다면

더 이상 짠 맛을 잃어버린 소금밖에 못 되는 것이고, 그러나 상호섬김의 카리스마에서 나오는 부활의 신선한

매력을 느낄 수 있게 된다면 세상의 어둠을 비추는 하느님의 빛으로서 인류의 희망과 기대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까지 그레고리오 교황의 대개혁 이래로 천오백여 년이나 흘러온 역사를 대충 훑어만 보아도

권위주의의 권력과 상호섬김의 카리스마 간의 긴장과 갈등은 좀처럼 산뜻한 해결책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현 교황도 이 점에 있어서 솔선수범하면서 각별한 관심을 표명하고 있지만,

주변의 노회한 추기경단의 견제가 만만치 않은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상호섬김보다는 사두가이적 카리스마를 지닌 고위 성직자단의 저항이 드셉니다. 이런 저항의 분위기는

비단 바티칸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각 교구의 교구청마다 빠짐없이 감지됩니다. 왜 그럴까요?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욕심에서 죽고, 자존심에서 죽고,

명예심에서 죽고, 관행과 체면에서 죽어야 하기 때문에 어려워서 미루기도 하고 거지반 포기하고 사는 겁니다.

현상유지적 경향이나 복지부동적 자세나 교회쇄신을 마냥 미루려는 분위기만 가지고서도

그걸 더 좋아하는 평신도들이 꼬이기 때문에 문제 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듭니다.

게다가 이웃 교파가 워낙 사고를 많이 치니까 가톨릭교회는 하던 대로만

당히 해도 중간 이상을 가리라는 어부지리(漁父之利)적 계산도 작용을 합니다.

이래서 사제직은 하느님의 종으로서 상호 섬김의 카리스마를 발휘하지 못하여 만성적인 정체성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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