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께서는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
- 성령의 作戰: 죄의 誘惑에 맞서는 代贖信仰, 共同善을 위한 使徒職의 實踐
창세 9,8-15; 1베드 3,18-22; 마르 1,12-15 / 사순 제1주일; 2021.2.21.; 이기우 신부
⒈ 사순 제1주일인 오늘 말씀의 주제는 죄의 유혹을 이겨내도록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먼저 제1 독서에서는 대홍수 동안 방주(方舟) 덕분에 살아남았던 노아와 그 가족들은 물론 함께
살아남은 모든 생명체들과 하느님께서 계약을 맺으시며, 그 표징으로서 무지개를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인류와 맺으신 이 첫 계약은 노아처럼 그 후손들이 하느님의
마음을 들 만큼 선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전제가 달려 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노아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된 인간이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선하게 살면 재앙을 겪을 염려를 하지 않고도
평화롭게 살 수 있게 해 주시겠다는 이 첫 계약은, 그래서 생명과 평화의 계약이라고 부를 수 있었습니다.
⒉ 그런데 불행하게도 생명과 평화의 다짐에도 불구하고 노아의 후손들
가운데에서도 죄는 또 다시 저질러졌고 이전의 무법천지를 방불케 할 만큼
죄를 저지르는 바람에 죄가 퍼지고 퍼져서 급기야 죄로 가득 찰 지경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재앙적인 심판을 하시는 대신에 노아보다 더 충직한
아드님을 보내시어 세상에 퍼진 죄를 없애고 당신의 나라를 세우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 대해 마르코는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그때에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마르 1,12).
그러니까 성령께서는 먼저 세례 운동으로 온갖 죄인들을 불러 모아
회개시키고 있던 요한을 찾아가신 예수님으로 하여금 죄인처럼 세례를 받게 하시고는
곧바로 유다 광야로 나가게 하시어 사탄으로부터 유혹을 받게 하셨습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대홍수 심판의 교훈을 잊어버린 노아의 후손들이 죄를 짓게 되는
과정을 몸소 겪게 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죄를 짓기 전에 반드시 사탄으로부터 유혹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사탄이 건네는 유혹을 받으시며
사탄과 맞서시고 끝내 이기시는 영적인 싸움을 사람들이 배우게 하셨습니다.
⒊ 이를 두고 베드로는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
“옛날에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하느님께서는 참고 기다리셨지만 그들은 끝내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몇몇 사람 곧 여덟 명만 방주에 들어가 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노아의 방주가 아니라 세례의 물이 사람들을 구원하게 되었다는 것인데,
이 세례는 요한이 베푼 것처럼 죄를 씻어 내고 마는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힘입어 하느님께 바른 양심을 청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하느님께 이끌어 주시려고,
의로우신 분께서 불의한 자들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받은 세례는 물의 세례를 넘어서는 부활의 세례요, 십자가의 세례이며,
불의 세례인가 하면 성령의 세례입니다.
이 두 가지 차원의 세례가 분명히 구분되는 것은,
물의 세례가 자기가 지은 죄를 씻는 것인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는
그분처럼 불의한 자들이 세상에서 저지르는 죄까지도 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처럼 거룩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물의 세례로써 자신의 죄도 씻어야 하고,
그러나 그분을 본받으려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불의 세례, 성령의 세례,
십자가와 부활의 세례로써 다른 이들의 죄까지도 씻으라는 소명을 받고 있습니다.
이를 대속신앙(代贖信仰)이라 합니다. 이 대속신앙으로 모인 교회가 새로운 방주입니다.
⒋ 이러한 하느님의 말씀이 비추고 있는 우리의 현실은 어떠할까요?
우리나라는 이웃 나라들처럼 국제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파렴치한
행위를 하지 않으면서도 경제를 부흥시켰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서를 담은 한류를 세계에 전파하여 큰 호응을 받고 있기도 합니다.
한국의 근현대사 150여 년 동안 한국인들은 일본의 식민통치도 받았고,
억울하게도 미국에 의한 일본 대신 강제분단도 당하고, 동족상잔의 전쟁에다가,
빈곤과, 군사독재 마침내, 민주화의 시대를 모두 거치면서 살았습니다.
이런 고난의 과정에서 한국인들은 한(恨)많은 정서를 간직하기도 했지만,
그래서 워낙 슬픈 시절이다보니 조금이라도 흥겨운 일이 있으면
춤을 추며 그 기쁨을 드러내는 정서도 간직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최근 들어 한국 드라마나 영화들이 아시아권에서는 물론 유럽이나
미국에서도 큰 호응을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한국인의 정서는 세계적으로 독특합니다.
나라를 잃어버렸었고, 전쟁통에 삶의 터전과 가족들까지 잃어버려야 했던 설움을
뼈저리게 겪은 슬픔이 마음과 얼국 속에 깊이 배어있는데다가,
분노스러운 군사독재까지 겪으면서는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도 알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 와중에 산업화와 민주화까지 성취하면서 생긴 자신감을 바탕으로,
올림픽이나 월드컵 등 국제경기에서 한국 선수들이 선전하면 자기 일처럼 기뻐하면서
흥을 주체하지 못하고 표현하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그 모든 정서들이 한국의 드라마나 영화 속에 다 녹아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⒌ 더 있습니다. 못된 자들이 저지르는 사회적 불의나 부패,
갑질이나 패악질 등을 보면 기어이 척결하고야 마는 정의감도 남다릅니다.
시간 낭비를 참지 못해서 ‘빨리빨리’해 치우고 마는 정서도 공통적으로 한국인들에게 깔려 있습니다.
이런 정서는 다른 나라들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들이고 그래서 세계인들이 부러워할 만한 의식입니다.
이런 의식 속에는 무려 역사가 반만년에 이르고, 빼어난 역량을 발휘한 선조들을 두고 있다는
자부심도 있을 것입니다. 그 결과, 수많은 분야에서 혁신하는 실력이 한국은 세계 최고입니다.
더군다나 가난한 나라들에 가서 그 실력을 아낌없이 전수해 주고 있습니다. 대단한 나라입니다.
이제는 이런 정서와 실력으로 우리 사회를 물질적으로만이 아니라
가치에 있어서도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남에게 죄를 짓지 않는다는 정도로 착하게 살고 있다고 자부할 것이 아니라,
뒤처진 이들을 부추겨 세우면서 더 공정하고 더 평등하며 더 정의로우며
더 인간다운 사회로 만들어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야무지게
착해야 하는 이유는 눈부신 우리나라 성장의 그늘에는 부끄러운 현실도 있기 때문입니다.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2018년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6개 회원국 가운데에서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1위를 차지했습니다.
한 해 동안 1만 3,670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고, 하루 평균 37.6명이 자살한 것이며,
인구 10만 명당 사망자 수인 자살 사망률은 26.6명으로 그 전 해보다 늘었고, 계속 늘어가는 추세입니다.
이 수치로 자살률 1위를 연속적으로 16년 동안 차지하고 있습니다.
왜 자살을 합니까? 먹고 살기가 너무 힘들어 자살하는 겁니다.
부쩍 높아진 대한민국의 국격으로 잘 나가는 사람들이 많아진 또 다른 한편 구석에서는
코로나 사태 때문에 먹고 살기가 어려워 아예 세상을 등지겠다는 사람들이 이토록 많은 겁니다.
예수를 믿는 크리스챤이 천만 명도 넘는다는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치고는 너무나 창피한 일 아닌가요?
⒍ 우리의 신앙이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라면
그분이 어떻게 고난을 겪으셨는지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광야의 유혹 기사는 공생활 이전에 겪으신 일만을 전해주는 것 같아 보여도,
실제로는 공생활 내내 그분이 겪으신 유혹입니다.
사탄은 사십 주야 동안 단식하여 몹시 허기진 예수님께 이렇게 유혹했습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그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응수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빵의 기적을 일으키셨던 자리에서 당신이야말로 생명의 빵이심을
밝히시는 말씀으로 이어졌고, 최후의 만찬에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시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체성사에 참여하여 영성체하는 모든 가톨릭 신자들은 빵의 유혹이 의미하는 것들
즉 돈과 물질과 편리함의 유혹에 대항해서 말씀의 힘으로 맞설 줄 알아야 합니다.
⒎ 또한 사탄은 예수님께 하느님의 권능을 시험해 보라는 유혹도 건넸습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성경에 이렇게도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하고 응수하시기는 했지만, 사실 이 유혹은
공생활 내내 그분에게 다가왔던 억울하고 터무니없는 고난을 회피하고자 하는 모습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를 상징적으로 나타내어 주는 것이 겟세마니의 기도입니다. 옳은 일을 하면 이해받거나 인정받아야
하는데 오해를 받거나 심지어 의심받는다면 그 당사자가 겪어야 하는 고난이 이토록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아버지,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잔을 제가 피할 수 있도록 거두어주소서.” 하고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 고난을 피하고자 하는 유혹이 그만큼 끈질긴 것이었습니다.
아마 밤새 이 유혹에 시달리셨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끝내 예수님께서는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하고 순명하는 믿음으로 이겨내셨습니다.
간사한 사탄은 포기하지 않고 세 번째 유혹으로 집요하게 공격해 왔습니다.
“당신이 땅에 엎드려 나에게 경배하면 저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사실 누구에게나 고난의 방식 대신 좀 더 쉬운 방식으로 일을 성취해 내고 싶은 마음은
인지상정(人之常情)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하는 말씀으로 그 끈질긴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⒏ 이렇듯 사탄의 유혹들은 하느님께만 충실하려는 믿음으로만 물리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제대로 섬기려면 하느님 아닌 것이 하느님으로
위장하여 유혹하여 다가올 때에 정신 차리고 저항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들으려면 우상이 동원하는 그럴 듯한 유혹 논리에
넘어가지 않아야 하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려면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돌아올 영광이나 이익이나 명예에 대해서조차도 마음을 비울 줄 알아야 합니다.
노아가 하느님과 맺은 계약의 표징은 무지개였고, 이는 생명과 평화의 계약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인류의 물질문명과 패권국가들이 이 계약을 정면으로 어기는 범죄를 저질러온 역사가 이제까지의 흐름입니다.
그래서 노아의 후손들이자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가 생명과 평화를 위해 거듭 다짐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복신앙을 넘어서는 대속신앙에 바탕해서, 이를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서 공동선에 기여하는 사도직을 다짐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과 공동체야말로 우리가 하느님 앞에 보여드려야 할 생명과 평화의 기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