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나라의 믿음과 용서하는 공동체
이사 55,10-11; 마태 6,7-15 /사순 제1주간 화요일; 2021.2.23.; 이기우 신부
“주님, 당신은 대대로 저희 안식처가 되셨나이다. 당신은 영원에서 영원까지 계시나이다.”
이 입당송처럼 과연 이사야는, 하늘에서 내리는 비나 눈이 땅에 내리고 나면 다시 하늘로 돌아가는
법이 없이 땅에서 반드시 열매를 맺고야 마는 것처럼, 하느님의 말씀은 예언자를 통하여 세상에
선포되고 나면 사람들에게 생각의 씨앗을 주고 영혼의 양식을 주고야 만다는,
그래서 실행력은 물론 그 효력이 지속되는 영원성까지 지닌 말씀의 신비를 전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러한 하느님 말씀 가운데에서도 최고의 정수(精髓)에 해당되는 말씀을 선포하신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라고 최고로 높여 부르는 이 기도문에 복음의 고갱이를 담아서 전해 주셨습니다.
이 기도문은 크게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눌 수 있는데,
전반부의 초점은 하느님 나라이고 후반부의 초점은 용서입니다.
우리가 서로 용서하기만 해도 이미 다가온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여 세상에 세울 수 있다는 것인데,
그것은 용서가 그냥 저질러진 죄를 모른 척 하고 보아 주는 게 아니고 서로 인격적으로 받아들여 사실상
죄를 없애는 매우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행동이기 때문이고, 그렇게만 해도 하느님 나라가 세워질 수 있는
이유는 성령으로 믿는 이들과 함께 계시는 예수님께서 그 나라를 줄기차게 선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이 두 가지 초점 외에 많은 것을 청한다고
빈말을 되풀이할 필요가 없다고 친절하게 일러주셨으며, 전능하신 창조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죄다 알고 계시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서 관심을 기울이고 계시는 최고의 메시지, 즉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고
이를 위해 믿는 이들끼리 하느님 나라를 위한 일꾼으로 서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다른 모든 것들을 곁들여서 덤으로 얼마든지 주시겠다고 하셨고,
이것이 인간이 하느님과 맺을 수 있는 관계의 최고봉이자 핵심입니다.
인류 문명의 역사상 정신적 스승으로 자처하거나 존경받는 인물들도 많지만, 오늘 이 가르침은
그 모든 종교와 사상의 거목들을 훌쩍 넘어서는 그래서 마치 족집게 과외 선생님 같은 알짜배기 계시입니다.
이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 다른 경우는 사람으로서 초인간적으로 열심히 노력한
성과로 얻은 귀한 열매이기는 하지만 예수님은 사람으로 오셨어도 본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모든 종교나 사상의 스승들의 가르침을 빈말의 모음이라고 배척할 필요가 없으며
좋은 참고사항으로 삼으면 됩니다.
이렇게 훌륭한 가르침을 받은 교회가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 세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여러 번 맞이했었습니다.
로마, 유럽, 그리고 남북 아메리카 대륙에서 맞이했던 선교 기회가 그것입니다.
제자들로 이루어진 교회가 처음에 맞이했던 기회는 3백 년 간의 박해 끝에
드디어 공인을 받고 국교로까지 떠받들여졌던 로마 시대에서 찾아왔습니다.
모든 제국 시민들을 천주교 신자로 만드는 데까지는 가능했는데,
그들을 도덕적으로도 성숙시키는 데에는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천년왕국처럼 영원히 번성할 것 같았던 로마제국은 어이없게도
로마가 돈을 주고 고용했던 게르만족 용병들에게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 아우구스티노의 신국론에 힘입어 다시 힘을 낸 교회는,
게르만족의 연합으로 이루어진 서유럽을 가톨릭 천하로 만드는 데까지는 성공했는데
하느님 나라보다 교회 자신의 권위를 더 앞세우고자 하는 바람에 황제들이 교권에
맞서기 시작하더니 루터를 필두로 정의감 넘치는 사제들이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개신교가 갈라져 나갔고, 산업혁명으로 돈을 모은 자본가들과 그에 영향을 받아 인간의 존엄성을
자각하게 된 시민들이 시민혁명을 일으켰는가 하면, 이래저래 소외되어 있는 가난한 노동자들마저 마르크스를
따라 무신론 진영으로 넘어가 버리는 바람에 유럽의 복음화는 이제까지 지지부진한 채로 남아 있습니다.
여기서 갈등이 무한증폭되던 좁은 유럽을 떠나서 바다 건너에 있는
새로운 대륙에서 하느님 나라를 세워보려는 선교적 시도가 생겨났는데, 유감스럽게도
무기를 앞세운 시도였고 교회는 이 정복과 침략의 힘에 올라타서 선교를 해도 좋은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스페인이 주도했던 남아메리카에서는 원주민 8백만 명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정복 선교를 저지르다가
과달루페에 발현하신 성모님께서 막아 세우셨고, 영국이 주도한 북아메리카에서도 원주민들을 죽이거나
노예로 삼아 가두어놓고는 그 알짜배기 땅을 모조리 빼앗아서 신세계를 세워보겠다고 애썼지만
풍부한 자연자원과 몰려든 이민으로 역시 풍부해진 인적 자원을 활용하여
전 세계를 군사력으로 지배하는 패권에 그치고 있습니다.
2천 년에 걸친 선교활동으로 교회가 세워보려던 이 ‘하느님 나라’가
최근의 가톨릭 사회교리 용어로 번역하면 ‘사랑의 문명’입니다.
이는 군사력이나 경제력 또는 이에 바탕한 학문 등 물질문명의 차원에서 개발한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껏 실패한 선교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자면 주 기도문 후반부에서 가르치시는 주제에 주목해야 합니다.
즉,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용서함으로써 인간 공동체를 이룰 줄 알고 이를 핵심으로 하여
사회를 공동체적으로 조직하는 사랑의 문명이라야, 주변 나라의 사람들도
서로가 앞다투어 받아들이려고 주목하는 세상의 빛이 되어 선교적 성과를 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느님 나라에 대한 믿음과 서로를 받아들여주는 공동체를 이룩해야 생각에 씨앗을 주고
영혼에 열매를 내는 영원한 말씀이 선포되는 겁니다. 생명과 평화는 이러한 사랑의 문명의 열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