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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에 이르는 길로 나아갑시다

작성자구유|작성시간21.02.24|조회수94 목록 댓글 1

 

 

부활에 이르는 길로 나아갑시다

 

요나 3,1-10; 루카 11,29-32

사순 제1주간 수요일; 서원갱신미사; 2021.2.24.; 이기우 신부

 

우리는 사순 시기를 시작하던 재의 수요일에 이렇게 기도 바쳤습니다.

“주님, 그리스도를 믿는 저희가 거룩한 재계로 악의 세계와 맞서 싸우려 하오니 극기로 보루를 쌓게 하소서”(본기도).

사순 제1주일의 복음이 광야에서 사탄이 예수님을 유혹하는 이야기였던 데에서도 나타나듯이,

사순 시기는 예수님을 본받고 하느님을 닮으려 노력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악마가 사탄으로서

유혹하는 상황을 특별히 영적으로 식별하고, 영적으로 맞서 싸우는 때입니다.

이 시기 40일 동안에만 악마가 준동하는 것이라서가 아니라 늘 인간의 마음 속에 숨어서

악에로 유혹하지만 이 시기에 바로 그러한 점을 의식하여 영적인 전투를 하는 때입니다.

이 영적 전투에서 믿음으로 맞서시며 이기신 예수님의 이야기가 그래서 우리에게 복음입니다.

 

이 싸움에서 필요한 영적 무기가 있습니다. 방어용 무기는 자선과 단식과 기도로 사탄에게

허술한 틈을 보여주지 않고 자기 자신을 다잡는 생활태도이고, 공격용 무기는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처럼

믿음과 고백과 증거로 성령의 지원을 얻어 사탄의 본 정체인 악령을 제압하는 신앙태도입니다.

사순 시기가 닥칠 때마다 교회가 전통적으로 신자들에게 강조해 온 자선과 단식과 기도도

사탄과의 싸움에서 방어용으로 유용하기는 합니다만, 군사적 상식으로 보더라도 공격은 최선의 방어입니다.

즉, 믿음과 고백과 증거에 이르지 못하는 자선이나 단식이나 기도는 취약할 수밖에 없고

언제든지 또 얼마든지 공격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생전에 이미 고백을 받으셨지만

믿음을 잃어버렸던 시몬 베드로를 찾아서 다시 믿음의 고백을 받아내셨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같은 물음을 세 번씩이나 연거푸 던지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제자들 가운데 제일 먼저 신앙을 고백한 공로로 수제자로 신임받았던 그였지만 스승님께서

잡혀가실 때 나 몰라라 하고 도망도 쳤었고, 그렇다고 마음이 약해서 멀리 가지도 못하고

스승이 재판받으시던 대사제 집 근처에서 얼쩡거리다가 그 집 사람들에게 의심어린

신문을 받는 바람에 얼떨결에 스승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배신자 처지에 영 면목이 없었던 그였습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다른 제자들이 보는 앞이라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하지 않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수제자로 신임하셨던 베드로의 체면을 살려주시려는 의도가 분명히 드러나 보였습니다.

 

그래도 같은 질문을 세 번씩이나 던지면 짜증이 날 법한 일인데,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당신을 부인했던 처지라서, 이 세 번에 걸쳐 연거푸 던져주신 질문이 차라리 고맙기 짝이 없었습니다.

사실 이 세 번의 질문과 역시 세 번의 대답은 스승과 제자 사이에 상처를 치유하고

다시금 사랑을 확인하며 재신임을 하기 위한 아름다운 대화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 장면을 솔직하게 기록한 요한 사도나, 그가 쓴 복음서를 통해 당시 교회 수장이었던

베드로의 허물을 숨김없이 드러내면서 오히려 모든 신자들의 믿음을 다잡는 반면교사로 삼으려던

당시 교회의 뜻이 또한 거룩하기까지 합니다.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믿음이 튼튼해야 사탄이 감히 넘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이 가장 분명해지고 강력해질 수 있는 조건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알게 되는

그 인격적인 예수님이 부활하여 우리와 함께 현존하여 계시는 분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바로 그 때문에, 그제까지 그가 알고 있던 모든 지식과 사회적 지위와

온갖 유리한 혜택을 쓰레기처럼 해로운 것으로 여기고는 내다버렸습니다.

 

사실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서, 우리 안에서 더 안다고 해 보아 얼마나 더 알 것이며,

가졌다고 해 봐야 그게 그분 앞에 무슨 가치와 소용이 있겠습니까? 장애물이 되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모든 말씀에 최대한의 주의를 기울여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으며,

십자가를 대하시던 그분의 처신에 역시 최대한의 주의를 기울여 본받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렇게 고생스러운 길에 동참하려고 애쓴 이유는 길거리에서 흔하게 만나는 장삼이사(張三李四) 같이

이 귀한 인생을 허비하기는 싫었고 오직 예수님처럼 부활하는 삶에 이르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기성 사도단에 속한 선배 주류 사도들이, 특히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재판을 통해

사랑과 신앙을 아울러 고백하고 재신임을 받은 후 베드로가 요한과 함께 사두가이들에게 끌려가

매를 맞고 나왔으면서도 스승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하게 된 것을 오히려 기뻐하고

나왔다던 그 전설적인 미담을 자기 자신도 체험하고 싶었던 바오로였습니다.

이런 지향으로 그는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겸손하고자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이미 그것을 얻은 것도 아니고 목적지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차지하려고 달려갈 따름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그래도 가장 모범적인 공동체로 생각하고 있었던

필리피 공동체의 신자듥에게도 이런 속내를 비치면서 진심으로 권고하였습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하늘로

부르시어 주시는 상을 얻으려고, 그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성숙한 사람인 우리는 모두 이러한 생각을 지닙시다. 아무튼 우리가 어디에 이르렀든 같은 길로 나아갑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부활에 이르는 길로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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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요셉-막내165 | 작성시간 21.02.24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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