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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사랑과 겨레 사랑의 황금률

작성자구유|작성시간21.02.25|조회수130 목록 댓글 1

 

 

하느님 사랑과 겨레 사랑의 황금률

 

에스 4,17; 마태 7,1-12 / 사순 제1주간 목요일; 2021.2.25.; 이기우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으로 가르쳐주시는 바가 바로 사랑의 황금률입니다.

사랑이란 남이 우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대로 먼저 남에게 해 주는 것이라는 가르침이지요.

그 최소한은 남이 우리에게 하지 않기를 바라는 대로 우리도 남이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

즉 예의를 갖추어 사람을 대하는 태도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최대한은 남을 위하여 자기 목숨이나 일생을 바치는 것, 즉 생명을 봉헌하는 태도일 것입니다.

특히 이 황금률의 최대한에 있어서 또 최고봉이 하느님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순교와 겨레와

나라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순국, 이 두 가지일 텐데

하느님 사랑과 겨레 사랑을 하나로 일치시킨다면 이는 최고봉 중의 으뜸이겠지요.

 

제국주의 일본인들에게 나라를 빼앗긴지 십 년 만에 이천만 동포가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비무장으로 평화 시위를 벌였던 삼일절을 며칠 앞두고,

우리는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 사랑으로 겨레를 사랑한 에스테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페르시아로 끌려가 유배생활을 하던 중에 뛰어난 미모와 교양 덕분에 유다인이면서도 왕비로

간택된 에스테르는 자신을 아버지처럼 키워준 모르도카이가 알려준 바,

간신 하만이 페르시아로 끌려와 있는 유다인들을 죽이고 그 재산을 차지하려 한다는

끔찍한 음모를 전해 듣고는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서 간절한 심정으로 하느님께 기도 바쳤습니다.

오늘 입당송에 나오는 대로, “주님, 제 말씀에 귀를 기울이소서.

제 탄식을 들어 주소서. 저의 임금님, 저의 하느님, 제 기도 소리 귀여겨 들으소서.” 하는

시편 5,2-3의 기도가 바로 에스테르의 기도였습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이스라엘을 당신 백성으로 선택하시어

이집트 종살이에서 구해주셨으며 또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이끌어주셨음에 감사를 드리면서,

사자 같은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 앞에 나아가서 탄원할 때 함께 해 주시기를 청원하였습니다.

당시 페르시아 법으로는 왕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나섰다가는 그것만으로도 죽을 수도 있었지만,

죽기를 각오하고 나서기로 작정하고는 하느님께 부르짖으며 기도 바쳤습니다.

그랬더니 오늘 화답송 시편 138편의 말씀처럼, “주님, 제가 부르짖던 날, 당신은 제게 응답하셨나이다.”

하는 기도대로 유다인들은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청한 대로 받고, 찾은 대로 얻은 것이며, 문을 두드린 대로 열린 셈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당신 백성으로 택하신 하느님께서는 일찍이 우리 한민족에게도 드높은 하늘의 기상을

심어 주셨으므로 우리 조상들은 천손의식(天孫意識)을 지니고 평화를 사랑하는 문화를 일구어 왔습니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벼를 재배하여 농업혁명을 일으켰으며, 하늘을 관측하여 천문에 담긴

우주달력을 만드는 등 뛰어난 창의력을 발휘하여 발달시킨 문물을 주변 민족들에게 전해 주었으나,

그들은 전해 받은 그 문물로 힘을 길러서는 싸움을 걸어오기도 하고 백성들을 괴롭히기도 했지만

우리 민족은 하늘에서 받은 뜻 즉 홍익인간과 재세이화의 건국이념에 따라서 땅과 사람과 문화를 지키는

데에 주력했을 뿐 그네들을 침략하거나 약탈한 적이 없었고 종으로 부리거나 괴롭힌 적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아시아의 서방에서 하느님의 빛을 받아 생명에 대한 가르침을 남겨 주었다면,

우리 한민족은 아시아의 동방에서 하느님의 빛을 받아 평화에 대한 모범을 남겨 주었습니다.

그렇지만 카인이 아벨을 시기하여 죽였듯이,

하느님을 모르던 민족들로부터 핍박을 받아 모진 시련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 종살이로도 모자라 바빌론으로 끌려가기도 했고

나중에는 제 땅에서 그리스와 로마세력의 식민통치를 받기도 했습니다.

우리 한민족도 드넓었던 강역에서 밀려나서 한반도 땅에까지 움추러 들었으며,

일제의 종살이 40년에다가 한반도마저 갈라진 채 70 년, 도합 백여 년의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하지만 잘못도 저질렀으니, 하느님의 백성이라던 이스라엘 민족은 사람으로 오신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죄를 저지르기도 했으며,

한민족 역시 그 하느님을 믿던 천주교 신자들을 임금도 부모도 모르는

무리로 몰아서 박해하는 죄를 저지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표층해류 대신 심층해류가 바닷물을 움직이듯이, 이스라엘 민족에서는 가난하지만

겸손되이 하느님을 섬기던 아나빔들이 생명의 주님이신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분의 제자가 되어 교회를 이루었으며, 한민족에서도 예수님의 진리를 찾다가 알아보고 교회를

이룬 이들은 평화를 갈망하며 진리를 찾던 이들이었습니다. 꼴찌가 첫째되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페르시아 치하에서 위기에 처했을 때

목숨을 건 기도로 동족을 구한 에스테르가 있었다면, 한민족이 일제 치하에서

민족적 위기에 처했을 때 목숨을 건 행동으로 동족을 구하려 했던 안중근과 유관순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들에게서 하느님 사랑과 겨레 사랑으로 자신의 목숨이나 일생을 바친 귀한 모범을 봅니다.

에스테르는 비록 유배 하에서이기는 했지만 왕비의 고귀한 신분이었다면,

안중근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 나라를 구하려고 자발적으로 일어선 의병이어서 지휘할

병력조차 없기는 했지만 그래도 장군이었는데 유관순은 그마저도 아닌 평범한 여고생이었습니다.

자, 예수님께서는 청하는 대로 받고, 찾는 대로 얻으며, 문을 두드리는 대로 열어 주리라고 약속하셨는데,

그렇다면 이 세 위인의 삶과 신앙에 비추어 우리가 과연 무엇을 청하고, 어떤 지향으로 찾으며,

무슨 문을 두드려야 하겠는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진리는 생명과 평화를 향한 사랑의 황금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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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요셉-막내165 | 작성시간 21.02.25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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