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신명 26,16-19; 마태 5,43-48 / 사순 제1주간 토요일; 2021.2.27.; 이기우 신부
하느님께서는 창조주이시고 인간은 그 피조물이며 세상은 그 무대요 역사는 그 흔적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창조 설화는 아득한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도 현재진행중인 하느님의 창조에 대한 통찰입니다.
그러니까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말씀과 영으로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셨고,
이 창조 사업은 한처음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창조뿐만 아니라 마귀가 유혹하여 사람이 저지르는 원죄까지 그렇습니다.
이러한 창조 신앙에 따라 주어진 계시를 모세도 자신이 깨달은 대로,
또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 전해 주었습니다.
“오늘 주 너희 하느님께서 이 규정과 법규들을 실천하라고 너희에게 명령하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것들을 명심하여 실천해야 한다”(신명 26,16).
이러한 명령의 근거는,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으로 삼으신 이스라엘을 모든 민족들 위에 높이 세우시어
진리의 빛을 비추는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심으로써 이 빛을 받는 모든 민족들 안에
당신의 나라를 세워 인류의 행복을 이룩해주시고자 하는 창조주의 의지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전해준 하느님의 법을
당시 유다인들이 어떻게 왜곡시켰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셨습니다.
그분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가르침에 따르면,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마태 5,43)”고 전제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인용 말씀은 신명기 19,18에서 따오신 것인데,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동포에게 앙갚음하거나 앙심을 품어서는 안 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
즉,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야 할 이웃은 동포라고 해석될 수 있는 구절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미워해도 좋다고 여겼던 원수란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에 관한 원 출전구절은 이렇습니다.
“너희와 함께 머무르는 이방인을 너희 본토인 가운데 한 사람처럼 여겨야 한다.
그를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다.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레위 19,34).
여기서도 이방인은 동포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야 할 똑같은 이웃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원수는 미워해도 좋다고 당시 청중들이 알고 있던 바를 지적하신 것인데,
이 잘못된 이해는 본래 신명기의 성경 말씀이라기보다는 그에 대해 바리사이들이
구전으로 전수해 내려온 구두 율법 내지 율법 주석에 근거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마태 5,44-45)고 바로잡아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웃 사랑에 있어 동포나 이방인의 구분은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단지 먼저 하느님의 계시를 받은 백성이 이스라엘이었기에
다른 민족들에게 그분의 사랑을 전할 사명을 주셨을 따름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산상설교를 시작하시며 진복팔단을 가르치신 예수님께서,
이 말씀의 의미가 조상 대대로 전해들은 율법과 다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율법을 본래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취지대로 완성하고자 하는 것임을 밝히시며 몇 가지 예를 드신 사례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사례들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아내를 버리지 말라, 정직하여라,
폭력을 포기하여라 하는 등의 가르침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말씀 역시 진복팔단에 나와 있는 하느님의
참행복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시고자 드셨던 사례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창조와 원죄가 부딪치는 상황에서 그분의 말씀과 영은 결정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계시되었으며, 사람들은 우선 자신의 삶에서, 그리고 가정과 인간관계에서,
나아가서는 사회에서도 이 하느님의 말씀과 영으로 살아가면서 문명을 이루어나갑니다.
그런데 인간의 응답이 하느님의 뜻과 맞으면 그 개인의 삶과 사회의 문명이 꽃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지만, 어긋나면 꽃을 피우기도 어렵고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계시의 말씀과 그 해석, 계시를 실천하게 해 주는 영과 이에 따른 실천의 역사가 인간과 인류의 역사입니다.
동포에 대해서건, 이방인에 대해서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참된 행복을 이루기를 바라시는 이 계시에 대해서 우리는 믿음과 공동체로 응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이 땅에서, 또한 각자의 삶에서 하느님 나라를 창조하시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일이 됩니다.
우리가 개인적 삶에서든 가정이나 사회적 인간관계에서든, 또는 나라와 문명을 이루어야 할 활동에서든,
진리는 창조주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서 나누어야 하는 소명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 진리가 하느님 나라를 각자의 삶에서, 가정에서 사회적 인간관계에서,
또한 나라와 문명에서 이룩하게 하는 힘이요 섭리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이를 위하여 주어진 설계도이여 그분의 영은 이를 위해 주어지는 기운입니다.
그리고 이 점에 있어서 기준이자 모범은 이웃 사랑을 위하여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온전한 길을 걷는 이들은 행복하다고 선언되는 것이고, 마음을 다하여
그분을 찾고 그분의 법을 지키는 이들이 행복하다고 선언되고 있는 것입니다(시편 119편, 화답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