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양업 신부님의 삶과 신앙 : 교구 그룹웨어 자료 참조
1. 신앙의 선조와 출생
최양업은 부친 최경환(崔京煥, 프란치스코, 1805-1839년)과 모친 이성례(李聖禮 마리아, 1801-1840년) 사이에서 1821년 3월 1일 충청도 홍주의 다락골(현 충남 청양 화성면 농암리 누곡)에서 여섯 형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경주이고, 아명은 정구(鼎九)이며, 세례명은 토마스이다. 가톨릭 신앙은 그의 증조부 최한일로부터 시작하였고, 할아버지 최인주, 그리고 아버지 최경환 성인에게 전수되었다. 박해를 겪으면서 가족들이 냉담하자 최경환 성인은 고향과 친척과 재산을 포기하고 서울 회현동등 여러 산골로 이사를 하며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부평의 한 교우촌에서 장남 최양업을 신학생으로 봉헌하였다. 최양업은 편지에서 아버지 최경환을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밭에서 일할 때나 집에서 일할 때나, 길에서 누구와 담화를 할 때나, 항상 천주교 교리와 신심 사정에 관한 이야기만 하였습니다. 장을 보러 갈 때는 물건 중에서 제일 나쁜 것이나 흠 있는 것을 골라서 사 옵니다. ‘제일 나쁜 물건을 사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하지 않겠소? 그런 사람이 없으면 이 불쌍한 장사꾼들은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소?’ 과일을 추수할 때가 되면 가장 좋은 것을 골라 이웃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여덟 번째 서간, 1851년 10월 15일)
이러한 집안 배경에서 자라난 최양업은 나중에 성무 활동을 하면서 언제나 어렵고 가난한 처지에 있는 교우들을 먼저 배려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당고개 성지에서 순교한 이성례 마리아 복자다. 최양업은 같은 서간에서 자신의 어머니가 내포 지역에 복음을 전한 이존창의 후손임을 밝혔다.
“이존창의 집안이 처음에는 모르고서 가짜 사제를 냈으나 나중에는 진짜 사제를 내는 영광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곧 그 집안의 딸들에게서 두 명의 사제들이 탄생된 것입니다. 그의 딸 이 멜라니아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조모이고, 이(성례) 마리아는 이존창의 사촌 누이 멜라니아의 조카딸입니다.”
1839년 기해박해로 수리산 교우들이 모두 잡혀간 뒤, 그들 가운데 대부분이 배교하고 풀려났지만, 이성례의 남편 최경환은 배교를 거부하다가 끝내 이 에메렌시아와 함께 옥사하고 말았다. 이성례는 남편의 옥사를 지켜보다가 갓난아이에 대한 모성애로 마음이 흔들려 배교하였다. 그러나 첫째 아들을 국경 너머 중국으로 보냈다는 죄목으로 다시 붙잡혀 와서 마침내 ‘위주치명’(爲主致命, 주님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다.)하였다. 여섯 형제 가운데 넷째 최우정 바실리오에 대한 이력서가 전해지는데, 거기에는 기해박해의 일화에 대해서 다음과 묘사되어 있다.
“이때 열두 살 된 야고보(여섯 형제 중 둘째)는 나이가 어림으로써 옥사쟁이에게 소청하여 옥중에 가끔 들 적에 푼푼이 주선하여 음식을 사 그 모친께 공궤(供饋, 음식을 드림)할 새, 시름없는 걸음으로 집에 돌아와 전전푼푼이 모아 가지고, 모친 치명하신다는 당일에 옥사쟁이를 찾아가서 묻되, ‘이번 행형하는 희광이(회자수)가 누구냐?’ 하니 ‘아무개라’ 하기에, 찾아가서 있는 전냥을 주며 부탁하기를, 모습이 이러이러한 죄수는 우리 모친이시니 칼을 갈아 행형하되 각별히 조심하기를 청하니, 무도한 희광이도 칭찬하며 ‘염려 말라’ 하더라”(최 바실리오 우정 씨 이력서).
이렇게 이성례 마리아는 여섯 자녀 가운데 맏이를 교회에 봉헌하고, 막내를 옥중에서 하느님께 봉헌하며 자신도 순교의 영예를 얻었다.
2. 신학 교육(철학 과정)
신학생으로 선발된 최양업은 세 소년 중에 가장 먼저 1836년 2월 6일 한양의 모방(Maubant) 신부 댁에 도착하여 라틴어 수업을 받기 시작하였다. 3월 14일에 최방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7월 11일에는 김대건 안드레아가 합류하였는데, 아마 가장 먼저 시작한 최양업은 세 소년 중에 선배 노릇을 하였을 것이다. 이듬해 6월 7일에 마카오에 도착한 세 소년은 프랑스 선교사들 밑에서 신학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최방제 신학생이 그해 11월 27일 열여섯 살(또는 열일곱 살)로 사망하였다. 초대 교장이었던 칼르리(Callery) 신부는 그 안타까운 심정을 편지에 담았다.
“세 명 중에서 믿음이 더 강하였고 신심이 더 깊었으며, 앞으로 이 어린 교회의 가장 아름다운 존재로 촉망되던 학생이 꽃다운 나이에 우리 곁을 떠나야 하였습니다. 그가 라틴어 공부에서 보인 진전은 만족스러웠습니다. 식사할 동안 그는 성경을 알아듣게 낭독하였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그에게 가장 큰 기대를 걸게 되었을 때, 지난달 중순경에 위열병에 걸렸습니다. 그리고 매우 열심히 성사를 받았습니다. 하비에르는 나의 손을 잡고 ‘그라시아스 파트리’(Gratias Patri, 신부님 감사합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어 그는 그의 고상을 입에 가져다 대고 ‘착한 예수, 착한 천주’(Jesus bonus! Deus bonus!)를 열심히 되풀이하였습니다. 우리의 성스러운 젊은이는 그의 천주님 곁으로 가고자 조용히 숨을 거두었습니다"(칼르리 신부가 파리 신학교 뒤브아[Dubois] 신부에게 서간).
세 신학생은 마카오-필리핀 롤롬보이-상하이-창춘의 소팔가자 교우촌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최양업 신부가 우수하다고 평가하였다. 아마 조선에서부터 5개월 이상 먼저 라틴어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두 소년은 모두 라틴어, 프랑스어, 중국어를 배워서 읽고 쓰고 말할 수 있었다. 최양업은 부제 시절(1847년경) 사전도 없이 73위 순교자 행적을 프랑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한 바 있고, 김대건은 신학생 시절에 라틴어 통역을 맡아 함선(에리곤호)을 탄 적이 있으며, 조선 입국을 위한 보고서 ‘훈춘 기행문’을 중국어 곧 한문으로 썼다.
3. 사제서품과 귀국
김대건 부제가 사제품을 받고 라파엘호를 타고 조선에 들어간 뒤 최양업 부제도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꾸준히 육로를 통한 입국을 시도하였다. 그러다가 1847년 봄이 되어서야 동료인 김대건 신부의 순교 소식을 듣고 애통해하면서 페레올 주교에게 받은 “순교자들의 행적”을 프랑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하였다. 이것이 바로 나중에 79위 복자가 탄생하는 데 가장 기초 자료가 되었다.
부제 서품을 앞두고 있던 최양업 신학생의 편지를 보면 그가 사목자로서 지향하는 바가 들여다보인다. “언젠가 좋으신 하느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저의 동포들을 만날 행운이 저에게 다가오기를 하루하루 바라면서 머물러 있습니다. 제 부모와 형제들을 따라갈 공훈을 세우지 못하였으니 저의 신세가 참으로 딱합니다. 그리스도 용사들의 그처럼 장렬한 전쟁에 저는 참여하지 못하였으니 말입니다. 정말 저는 부끄럽습니다! 이렇듯이 훌륭한 내 동포들이며, 이렇듯이 용감한 내 겨레인데, 저는 아직도 너무나 연약하고 미숙함 속에 허덕이고 있습니다”(최양업 신부의 2 서간, 소팔가자, 1844년 5월 19일).
최양업 부제는 2년 뒤인 1849년 4월 15일 상하이에서 예수회 마레스카 주교의 집전으로 사제품을 받았다. 최양업 신부는 1949년 12월 말에 육로를 이용하여 조선에 입국하였다. 여섯 번의 국내 입국 시도 끝에 성공한, 유학길에 오른 지 14년 만의 귀향이었다. 최양업 신부는 조선에 돌아오자마자 다블뤼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주고 페레올 주교의 명에 따라 주로 험한 산악 지대의 교우촌을 중심으로 성무 활동을 하였다. 그는 6개월 동안 쉬지 않고 주로 남부 지역 5개 도를 순방하였는데, 이동 거리가 약 5천 리 정도이며, 순방한 교우 수는 3,815명이라고 보고하였다. 이를 단순한 숫자로 볼 수 없는 것은 박해의 위험 속에서 하루하루 산골짜기를 오르내리며 교우촌을 찾아다니는 일이 매우 고되었던 까닭이다. 최양업 신부는 도앙골에서 쓴 서간에서 당시 교우촌을 순방한 상황을 기록하였다.
“저는 교우촌을 두루 순방하면서 지독한 가난에 찌든 사람들의 비참하고 궁핍한 처지를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저들은 포악한 조정의 모진 학정 아래 온갖 종류의 가렴주구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동료에게 오는 박해, 부모에게 오는 박해, 배우자에게 오는 박해뿐만 아니라, 친척들과 이웃들로부터도 박해를 받습니다. 단 한 번만이라도 사제의 얼굴을 보는 것이 (이들에게는) 큰 은총입니다. 우리가 어떤 교우촌에 도착하면 어른, 아이 남녀노소의 구별 없이 모두 새 옷으로 갈아입고 사제에게 인사하려고 한꺼번에 몰려옵니다. 그들은 공소 회장들을 연방 들여보내어 어서 인사하고 사제의 축복을 받을 수 있게 해 달라고 졸라댑니다. 어떤 사람들은 저를 못 떠나게 붙들려는 듯이 저의 옷소매를 붙잡고, 어떤 이들은 제 옷깃에 그들이 보내는 애정의 정표를 길이길이 남기려는 듯이 제 옷자락을 눈물로 적십니다. 어떨 때는 좀 더 오랫동안 제 뒷모습을 지켜보려고 산등성이에 올라가기도 합니다. 신자들은 거의 모두 외교인들이 경작할 수 없는 험악한 산속에서 외교인들과 뚝 떨어져서 살고 있습니다. 세속의 모든 관계를 끊고 산속으로 들어가 담배와 조를 심으며 살아갑니다”(7 서간, 1850년 10월 1일).
4. 최양업 신부의 업적
1) 복음 선교의 도구: 상복 제도와 한글
최양업 신부는 당시 어려운 상황 속에서 전교 활동과 교리 공부에 유용한 두 가지를 말하였다. 바로 조선의 상복(喪服) 제도와 한글이다.
“조선의 모든 법과 습관과 풍습은 한결같이 교회법을 지키지 못하게 방해하려는 목적으로 제정된 것 같습니다. 현재 상황에서 기적적으로 우리에게 유리한 것이라고는 오직 두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부모의 초상부터 탈상까지 입어야 하는 상복의 풍속과 한글이 전교 활동과 교리 공부에 큰 도움을 줍니다. 첫째, 상복이 전교 활동을 도와주는 풍속입니다. 부모의 상을 당하면 자식들은 삼 년 동안 대죄인으로 자처하고 최대한으로 죄를 뉘우치는 보속 생활을 합니다. 방갓을 머리에서부터 어깨까지 덮어써서 땅만 내려다 볼 수 있게 하고, 또 얼굴 가리개로 입에서부터 코와 눈까지 얼굴 전체를 전부 가리고 다닙니다. 이러한 풍속은 서양 선교사 신부님들을 위하여 발명된 도구라 할 만합니다. 만약 이러한 풍속이 없었더라면 서양 선교사 신부님들이 전교하고자 한 발짝도 외출할 수 없었을 것이고, 조선에 머무르는 것조차도 불가능할 것입니다. 둘째, 한글이 교리 공부하는 데 매우 유용합니다. 우리나라 알파벳은 열 개의 모음과 열네 개의 자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배우기가 아주 쉬워서 열 살 이전의 어린이라도 글을 깨칠 수가 있습니다. 이 한글이 사목자들과 신부님들의 부족을 메우고 강론과 가르침을 보충하여 줍니다. 쉬운 한글 덕분으로 세련되지 못한 산골에서도 신자들이 빨리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구원을 위한 훈계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1851년 8 서간)
2) 찾아가는 선교 활동
조선에 귀국한 뒤 최양업 신부의 선교 활동은 한마디로 발로 뛰는 사목, 교우촌을 찾아가는 사목이라고 말할 수 있다. 1850년 1월부터 1861년 6월까지 그는 주로 서양 선교사들이 순방할 수 없는 지역을 담당하였다. 1850년 1월 전라도 지역부터 시작된 사목 방문은 육 개월 동안 쉬지 않고 5개 도에 흩어져 있는 교우촌을 다니며 3,815명의 교우들을 만났는데, 이는 당시 전국 신자 수 11,000명의 약 35퍼센트에 해당한다.
“제가 담당하는 조선의 5도(충청도, 경상 좌·우도, 전라 좌·우도)에는 매우 험준한 조선의 알프스 산맥이 곳곳에 있습니다. 제가 담당하는 공소 곧 교우촌은 자그만치 127곳이나 되고, 그러한 마을에서 세례명을 가진 이들을 다 합하면, 5,936명이나 됩니다. 한 공소에 고해자가 마흔 명 내지 쉰 명이 있어도 그들 모두에게 하루 안에 고해성사를 다 집전해 주어야 합니다. 반면 고해자가 두 명이나 세 명밖에 없는 공소에서도 다음날 미사를 봉헌하고 신자들에게 성체를 배령하게 해 주어야 하기에 하루를 묵어야 합니다. 저는 밤에만 외교인들 모르게 교우촌에 도착해야 하고, 공소 순방이 끝나면 한밤중에 모든 일을 마치고 새벽녘 동이 트기 전에 그곳을 떠나야 합니다”(8 서간, 1851년 10월 15일).
최양업 신부의 고충은 무엇보다 동료 김대건을 너무나 일찍 떠나보내고 조선인 동료 한 명 없이 가장 어려운 선교 지역을 홀로 담당해야 하였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선교 지역에서 만나는 신자와 개종자들에 대한 여러 일화를 소개하면서 하느님의 사업이 얼마나 소중하고 신비스러운지를 전하였다. 최양업 신부님은 조선인 성직자 양성에도 힘을 기울였으나, 당시 박해가 심하여 결실을 거두지는 못했다.
3) 천주가사의 저술
1850년대에 와서 글을 읽지 못하는 여성 신자와 하층민 신자들이 더욱 증가하였다. 최양업 신부는 누구보다도 한글을 이용한 교리서, 신심서의 필요성을 인식하였다. 그리하여 누구나 이해하기 쉽고 암송하기 쉬운 대중적인 교리서요 신심서인 한글본 천주가사가 만들었는데, 이는 신자들의 신앙생활과 영적 성장에 자양분이 되는 소중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먼저 사말(四末 : 죽음, 심판, 천당, 지옥)을 노래한 ‘선종가’ ‘사심판가’ ‘공심판가’ 등과 천주가사의 진수라고 일컬어지는 ‘사향가’(思鄕歌)를 편찬하였다. 그의 천주가사는 신자 재교육의 측면에서 주요 교리를 다시 한번 주지시켜 주고, 이를 통하여 그들 스스로 묵상과 교리 실천, 신심 함양에 힘쓰도록 하려는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 특히 ‘사향가’는 당시의 신자들이 외우고 배우던 주요 교리와 기도문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신자들에게 긴요한 육화론적 영성(교리 실천)과 함께 종말론적 영성(순교 신심)을 함양하고자 지은 천주가사였다. 그는 바로 언문체 천주가사들을 통하여 교리의 토착화를 시도한 선구적 인물이었다. 이를 통해서 볼 때 그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 진리를 신자들에게 설명하며 가르치고 신자들의 수준에 맞게 보급하였으므로 ‘신앙의 교육자’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였다고 할 수 있다.
4) 순교자 자료 수집과 정리
뛰어난 재질을 가졌던 최양업 신부는 신학생 시절 배운 것만으로 라틴어를 정확하게 말하고 쓸 수 있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최양업 신부는 부제 시절 1847년 초에 현석문(玄錫文, 가롤로)와 이재의(李在誼, 토마스)가 수집하고 페레올 주교가 보완 정리한 프랑스어본 『기해-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여행 중에 사전도 없는 상황에서 라틴어로 번역하였다. 여기에 수록된 82위의 행적 가운데 기해박해 순교자 73위은 최양업이, 병오박해 순교자 9위의 행적은 메스트르 신부가 번역하였는데, 이 라틴어본 행적은 프랑스 파리에 있는 르그레주아 신부의 손을 거쳐 교황청으로 보내졌으며, 1857년 순교자 82위 모두가 가경자(可敬者, venerabilis)로 선포되었다. 이 라틴어 번역본이 한국 순교자들의 시복 첫 단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페레올 주교님께서 프랑스어로 기록해 보내 주신 순교자들의 행적을 읽는 것은 저에게 더할 수 없는 큰 위로가 됩니다. 이 치명록을 주교님께서도 원하시고, 메스트르 신부님께서도 권하시므로 제가 라틴어로 번역하였습니다. 프랑스어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라틴어도 겨우 초보자인 제가 주제넘게 번역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당하는 처절한 상황에 대하여 너무나도 큰 고통과 걱정을 계속 받고 계시는 우리 자애로운 어머니이신 로마 교회로 이것을 보내 조금이나마 위로를 드리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저의 번역서는 여행 중에 사전도 없이 쓴 것이어서 문장도 거칠고 문법에 어긋나는 것이 많을 것이므로 너무나 초라하여 감히 직접 로마로 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신부님께서 살펴보시고 이만하면 괜찮다고 여기시면 잘못된 곳을 정정하신 다음 로마로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4 서간, 1847년 4월 20일).
5. 땀의 순교자 가경자 최양업 신부를 다시 기억하며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최양업 신부의 11년 6개월에 걸친 사목 생활은 교우촌과 공소 방문을 중심으로 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성사를 집전하며, 어려운 삶들을 보듬어 주는 일이었다. 그는 조선 선교지의 본토인 사제 양성에 힘을 기울였고, 한글 서적을 통한 문서 전교와 천주가사를 통한 구두 전교에도 관심이 있었다. 순교자들에 대한 증언 자료를 수집하여 다블뤼 주교에게 정리해 드렸고, 사목 생활에서 겪은 여러 가지 영적 체험을 스승에게 보고하였다. 또한 스승 신부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조선 왕국 스스로 개방하기는 어려울 것이므로 외교적인 노력으로 도와 달라는 간접적인 표현을 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최양업 신부의 선종은 너무나 갑작스러웠으므로, 최양업 신부와 관련된 유품은 거의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기존에 소개된 열아홉 통의 서간과 최근에 추가로 발견된 2통의 서간이 전부다. 1859년 10월 12일 서간에서 최 신부는 자신이 건강하다고 하면서도 혼자 여행하기에 힘들고 하루에 고작 40리밖에 걷지 못하며, 먼 공소 순방 때는 말을 타고 있다고 쓰고 있다. 40리가 짧은 거리는 아니지만, 그의 표현을 보았을 때 몸 상태가 예전과 같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쩌면 이때쯤 체력적으로 약해진 것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이어서 일어난 경신박해는 그에게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도 많은 압박을 주었을 것이므로 이때 좀 더 휴식을 취하고 건강을 회복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최양업 신부는 마지막 편지에서 자기 죽음을 예견한 것처럼 스승 신부에게 인사하였다. “이것이 저의 마지막 하직 인사가 될 듯합니다. 저는 어디를 가든 계속 추적하는 포졸들의 포위망을 빠져나갈 수 있는 희망이 없습니다. 이 불쌍하고 가련한 우리 포교지를 여러 신부님들의 끈질긴 염려와 지칠 줄 모르는 애덕에 거듭거듭 맡깁니다”(열아홉 번째 서간, 1860년 9월 3일). 최 신부님은 경신박해가 누그러진 듯하자 교구장 베르네 주교에게 사목방문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오다 문경의 한 작은 교우촌에서 1861년 6월 15일 선종하였다. 가까운 동료였던 페롱 신부는 그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그의 죽음은 조선 교회 전체의 초상입니다. 또 우리를 난처하게 만들었는데 우리는 종교 자유가 선포될 때까지는 이 곤경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남쪽의 오지에서 방문하던 지역들은 지금까지 서양 선교사들이 갈 수 없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한문 지식과 조선인으로서의 장점은 우리에게 매우 필요한 책을 번역하는 일에 그를 누구보다도 적격자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벌써 이 분야에서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중에서 유일하게 이 일에 종사할 만큼 이 말을 잘 아는 다블뤼 주교는 그를 잃음으로써 그의 오른팔을 잃게 되었습니다”(페롱 신부, 1861년 7월 26일) 한다. 최양업 신부의 유해는 일단 그곳에 가매장 되었다가 11월 초에충북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 배론 신학교 뒷산 언덕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