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총, 하느님 현존의 표지
예레 18,18-20; 마태 20,17-28 / 사순 제2주간 수요일; 2021.3.3.; 이기우 신부
오늘 독서에서 우리가 들은 이야기는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예레미야를 없애려고 꾸민 음모였습니다.
이에 대해 예레미야는 공포에 사로잡혀서, “선을 악으로 갚아도 됩니까?”(예레 18,20) 하고
하느님께 탄원하면서 자신의 의로움과 억울함을 호소하였습니다.
그의 심정을 대변한 기도가 오늘 미사의 입당송이었습니다:
“주님, 저를 버리지 마소서. 저의 하느님, 저를 멀리하지 마소서.
주님, 제 구원의 힘이시여, 어서 저를 도우소서”(시편 38,22-23).
그런가 하면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삼년의 공생활을 마무리하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며 당신 제자들에게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셨습니다:
“나는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들은 나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로마인 총독에게 넘겨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마태 18-19).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스승께서 말씀하신 이 비장한
세 번째 예고를 듣고도 그 뜻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어머니를 통해 영광스런 자리를 청하기까지 했고,
그러자 이를 보고 있던 나머지 제자들은 불쾌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답답해지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다시 한 번
당신의 수난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강조하셔야 했습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20,26).
스승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단의 이 엉뚱한 분위기는 사실,
첫 번째 수난과 부활 예고에서 베드로가 대놓고 반박하던 태도(마태 16,22)와,
두 번째 수난과 부활 예고에서도 나머지 제자들이 몹시 슬퍼했던(마태 17,23) 것으로
미루어보아 충분히 예견되던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스승님께서 수난을 당하지 않기를 바라셨던 것 같고,
물론 자신들도 수난보다는 모종의 영광을 기대하고 있었던 듯합니다.
어머니를 동원한 야고보와 요한의 로비와 그에 대한 나머지 제자들의 반응이 그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제자들의 몰이해와 엉뚱한 반응이 못마땅하셨겠지만,
그래도 당신의 소명에 대해 담담하게 털어 놓으셨습니다.
그 가르침 속에는, 닥쳐올 수난이 결국 공생활 동안 당신이 행하신 섬김의 결과라는 가르침과,
또한 이로써 악에 물들어 있는 세상 사람들의 죄까지 씻어 없앰으로써 모두가
부활의 영광으로 가능하게 될 새로운 세상에서 살 수 있게 되리라는 강한 암시가 담긴 가르침이었습니다.
요컨대, 악인들의 음모로 수난당하는 의인 예레미야의 탄원과,
역시 억울하게 음모에 빠져 수난을 앞두고 계시지만 이 수난을 부활의 관건으로 삼으시는 예수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아듣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의 몰이해가 오늘 말씀의 초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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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 한 해동안 우리 교회는 김대건 신부 탄생 2백 주년을 맞이하여
“당신은 천주교인이오?” 라는 주제로 특별한 해를 보내고 있습니다.
김 신부를 포함하여 만 명이 넘는 천주교인들이 이 질문을 받으며 배교를 강요받았지만,
끝내 치명하여 복음 진리를 당당하게 증거하였습니다.
죽임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느님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은
예수님을 따라 수난과 부활의 진리를 증거한 증인들입니다.
부활 신앙은 섬김의 수난 속에서도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현존하고 계심을 알아보는 안목입니다.
무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과 온갖 자비하신 사랑을 깨닫고 감사할 줄 아는 이 안목이 바로 은총입니다.
단군 이래로 참으로 오랜 세월 동안 하느님을 알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온 우리 민족에게,
천주교인들은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알려주신 수난과 부활의 계시 진리를 증거함으로써,
참되게 하느님을 예배하는 방식을 알려준 것입니다.
사실 우리에게 요구되는 회개의 태도는 좀더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악인들이 꾸미는 음모와 그들이 저지르는 억압의 현실에 대해서
우리가 죄악을 떨쳐버리는 일은 기본일 것이요, 수난의 의미만 깨달아서도 불의한 현실을
개혁하기에는 모자라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수난을 통한 부활의 삶을 살아야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세상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믿으며 섬긴다는 것은 죄를 피하고 착하게 살면서
그분께 우리에게 필요한 축복을 청하는 자세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개인의 운수를 점치고 인생의 대소사(大小事)에서 행운이 깃들기를 기원하며
팔자가 순탄하기를 바라는 것이 보통의 한국인들에게 인지상정(人之常情)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디까지나 그것은 기복신앙(祈福信仰)일 뿐입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이미 거저 주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알아보는 안목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웃 사랑과 사회 공동선에 요청되는 섬김의 수난을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에 비추어 요청되는 적극적인 회개입니다.
사람이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져 존재하듯이,
“나라는 민족의 몸이요 역사는 민족의 혼(魂)”이라고 말합니다(李嵒, 1297~1364, 檀君世紀 序文).
그렇다면 그 혼에 하느님의 영이 결합되어 있어야 민족의 삶이 하느님 앞에서 살아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복적인 차원에 머물고 있는 우리 민족의 종교 의식(意識)에 복음적인 신앙 진리가
들어가게 된다면 현세적인 복을 비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이미 무상으로 주어져 있는 하느님의
현존에 대해 먼저 감사하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사회 공동선에 투신할 줄 아는 은총이 가능할 것입니다.
개인들도 민족도 하느님과 이어져 있어야 영혼이 살아있을 수 있고, 살아 있는 영혼이라야
은총을 느낄 수 있으며, 이 은총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 현존하신다는 표지입니다.
이것이 오늘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맡겨져 있는 선교적 과제인 동시에 회개의 목표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