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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 신뢰를 두는 이는 복되다

작성자구유|작성시간21.03.03|조회수133 목록 댓글 1

 

 

주님께 신뢰를 두는 이는 복되다

 

예레 17,5-10; 루카 16,19-31 / 사순 제2주간 목요일; 2021.3.4.; 이기우 신부

 

“하느님, 저를 꿰뚫어 보시고 제가 걸어온 길 살펴보소서.

저의 길 굽었는지 보시고 영원한 길로 저를 이끄소서”(시편 139,23-24, 입당송).

 

오늘의 독서와 복음은 모두 매우 대조적인 두 인간형을 제시하면서 우리에게 선택하도록 요구합니다.

먼저, 예레미야 예언자는 사람마다 제 선택에 따라 제 행실의

결과에 따라서 인생길이 이렇게 달라지리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주님을 신뢰하는 이도 있는데,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의지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고,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을 받을 것입니다.

치유될 가망이 없을 정도로 교활한 자는 좋은 일이 찾아드는 것을 보지 못할 것이며,

마음을 주님께 두는 이는 좋은 열매를 줄곧 맺을 것입니다.

 

그 다음, 예수님께서는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살아생전에 온갖 호사를 누리면서도 부자는 자선을 베풀지 않았지만,

종기투성이의 몸으로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빵 부스러기로라도 배를 채우고자 간절히 바랐던

가난한 라자로는 허기를 면하기는커녕 개들이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할 정도로 냉대를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살아서 고통받던 라자로는 죽어서 천국에 올라가 아브라함 곁에서 평안한 삶을 누리게 되었으나,

살아서 호강하던 부자는 불타는 지옥에 떨어져 목이 타는 듯한 고통을 맛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만 보아도 예수님께서 예레미야의 예언을 상기시키시는 듯 기본 구도는 비슷하지만,

메시지가 훨씬 더 강함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레미야의 경고는

현세에서 자기 행실에 따른 심판만을 제시한 데 비해서, 예수님의 경고는 현세에서만이 아니라

내세에까지 관철되고야 말 심판을 제시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정도가 훨씬 더 엄중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부자와 거지, 현세와 내세, 천국과 지옥 등 대조적인 일들이 날카롭게 대비되면서,

부자의 사치스러운 모습을 짧게, 가난한 라자로의 고통은 길고 상세하게 소개됩니다.

그런가 하면 부자의 죽음은 길고 자세히, 라자로의 죽음은 짧게 소개됩니다.

정작 죽은 후 부자가 겪는 고통은 길고 처절하게 묘사되지만,

라자로의 행복은 아브라함 곁에 있다는 간단한 표현으로도 충분한 것처럼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렇듯 대조적이면서도 구체적인 묘사 방식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매우 인상적으로

과연 어떻게 재물을 소유하고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가르치고자 하셨습니다.

즉, 라자로와 부자의 이야기에서, 재물을 그릇되게 소유하고 사용한 인색한 죄인의

전형으로 등장하는 부자는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 뒤에 자신의 말로 자신을 심판합니다.

그는 자신이 죽었다가 부활한 사람이 찾아가서 경고해야 할 정도로 아무런 성찰 없이 위험한 삶을

살았다는 것이며, 가난한 이들과의 나눔을 거절한 대가로 가게 된 지옥은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절대로 가서는 안 될 곳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심판적인 부자의 언도는 아브라함에 의해서 더 엄중하게 해석되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과의 나눔을 망설이는 부자들에게는 이미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

즉 성경의 가르침이 주어져 있으니, 죽은 사람이 다시 찾아가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옥이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그 고통을 덜어주러 가기에는

천국과 지옥 사이의 수렁이 너무 깊어서 도저히 건너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죽기 전에 회개하여 가난한 이들과 가진 재물을 나누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하여 우리에게 강조하고자 하시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내세의 천국과 지옥 사이의 간극처럼이나 현세의 경제 질서에서 생겨나고 있는

빈부의 양극화 현상 때문에 가난한 이들이 받아야 하는 고통을 지금 여기서 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세의 간극은 인간의 힘으로는 물론 하느님의 힘으로도 좁힐 수 없지만, 현세의 간극은 인간의 힘으로도

얼마든지 좁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의 경고대로 우리가 하느님께 믿음을 두기만 하면 그렇습니다.

 

이 비유를 소개한 루카는 바로 전 장인 제15장에서 되찾은 양이나 은전이나 아들 등

‘되찾은 이야기’ 비유들을 시리즈로 전한 바 있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실천하고

계셨던 바를 반영하는 이야기들로서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대한 가르침을 담은 메시지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라자로와 부자의 비유는 이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본받아야 할 인간의 실천을 강조하신 셈입니다.

재물을 어떻게 소유하고 사용해야 하는지에 따라서 내세에서 이루어질 하느님의 심판도 달라지겠으나,

현세에서도 메시아 백성에 소속될 수 있는지 여부가 달라질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6세 교황도 이 비유의 핵심에 대해서 회칙 「민족들의 발전」에서 이렇게 가르친 바 있습니다:

“빈곤의 극복이 아무리 급하고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인종이나 종교나 국적의 차별 없이 누구나 다 타인과 자연의 예속 상태에서 해방되어 참으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계, 명실상부한 자유세계, 가난한 라자로도 부자와 같은

식탁에 앉을 수 있는 인간 공동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인 것이다”(회칙 「민족들의 발전」. 47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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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요셉-막내165 | 작성시간 21.03.04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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