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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셉의 해(교황교서 『아버지의 마음으로』(Patris Corde) 요약)

작성자구유|작성시간21.03.05|조회수493 목록 댓글 1

 

 

성 요셉의 해(교황교서 『아버지의 마음으로』(Patris Corde) 요약)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요셉 성인께서 전 교회의 수호자로 선포된 지 150주년을 기념하여 교황 교서 『아버지의 마음으로』(Patris Corde)를 반포하시고, 모든 신자가 요셉 성인의 모범에 따라 하느님의 뜻을 충만히 실행하면서 날마다 자기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2020년 12월 8일부터 2021년 12월 8일까지를 성 요셉의 해로 정하셨다.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 다음으로 교황님들의 문헌에서 마리아의 배필인 요셉만큼 자주 언급된 성인은 없다. 교회는 구원의 역사에서 요셉의 핵심적 역할을 더욱 온전히 이해하고자 하였다. 복자 비오 9세께서는 요셉을 “보편 교회의 수호자” 로 선포하셨고, 가경자 비오 12세께서는 “노동자들의 수호자” 로, 요한 바오로 2세 성인께서는 “구세주의 보호자”라고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죽음을 앞둔 이의 수호자”인 요셉 성인에게 간구한다.

주목받지 않고 날마다 신중하게 자신의 존재를 숨기며 살아가는 요셉 안에서, 우리 저마다는 곤경에 처해 있을 때의 중재자, 지원자, 안내자를 발견할 수 있다. 요셉 성인은 숨겨져 있거나 그늘진 곳에 있는 이들이 구원 역사에서 비할 데가 없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교황님은 그들의 공로에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1. 사랑받는 아버지

요셉 성인의 위대함은 그가 마리아의 배필이었고 예수님의 아버지였다는 데에 있다. 이로써 요셉은,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이 “구원의 모든 계획을 위하여”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자신을 내어 맡겼다. 바오로 6세 성인은, “요셉은 성가정에 대한 자기의 법적 권한을 활용하며, 자기의 삶과 노동을 통하여 가족들을 위하여 자신을 온전히 헌신하였습니다. 요셉은 가정을 사랑하라는 인간적 성소가 자기 자신, 자신의 마음과 모든 능력을 봉헌하는 초인간적 봉헌, 곧 그의 가정에서 성장하는 메시아를 위하여 기꺼이 내어주는 사랑이 되게 하였습니다.” 요셉 성인은, 구원 역사 안에서 자신의 역할 덕분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언제나 사랑받는 아버지이다.

2. 온유하고 다정한 아버지

요셉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가는”(루카 2,52) 예수님의 모습을 날마다 지켜보았다. 주님께서 이스라엘에 하신 것처럼 요셉은 예수님에게 “걸음마를 가르쳐 주고 팔로 안아 주었습니다. 그는 젖먹이처럼 들어 올려 볼을 비비고 몸을 굽혀 먹여 주는 아버지였습니다”(호세 11,3-4 참조). 예수님께서는 요셉에게서 하느님의 온유한 사랑을 보았습니다. “아버지가 자식들을 가엾이 여기듯 주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을 가엾이 여기신다”[시편 103(102),13]. 요셉이 시편 기도를 바치는 동안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온유한 사랑의 하느님이시라는 말이 회당에 울려 퍼지는 것을 분명히 들었을 것이다. 온유한 사랑의 하느님께서는 모두에게 좋으신 분이시다.

하느님의 뜻, 그분의 역사와 계획은 요셉의 두려움 안에서도 작용하였다. 그리고 요셉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은 그분께서 우리의 두려움, 약점, 나약함 안에서도 일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임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또한, 요셉은 삶의 소용돌이 속에서 주님께 우리의 길을 이끄시도록 맡겨 드리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때로는 우리는 완전한 통제를 원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더 큰 그림을 보고 계신다.

3. 순종하는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당신 구원 계획을 마리아에게 보여 주실 때 하셨던 것처럼, 요셉에게도 당신의 계획을 드러내 보여 주셨다. 하느님께서는 꿈을 이용하여 그렇게 하셨다. 요셉은 마리아의 신비스러운 잉태로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요셉은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마태 1,19). 첫 번째 꿈에 나타난 천사는 요셉의 중대한 문제, 즉 마리아의 동정잉태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하며, 마리아를 죽음으로부터 구하여 해결하도록 한다. 두 번째 꿈에 나타난 천사에게 순종하심으로써, 어린 아기 예수님과 어머니 마리아를 헤로데의 칼에서 구할 수 있었다. 이집트에서 요셉은 집으로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다는 천사의 말이 있을 때까지 인내하며 믿음을 갖고 기다렸다. 세 번째 꿈에 나타난 천사는 그 아기를 죽이려는 자들이 죽었으니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로 돌아가도 된다고 알려 주었다(마태 2,19-20 참조). 요셉은 이번에도 바로 순종하였다. 돌아가는 길에 “아르켈라오스가 아버지 헤로데를 이어 유다를 다스린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가기를 두려워하였다. 그러다가 꿈에 지시를 받고, 갈릴래아 지방으로 떠나 나자렛이라고 하는 고을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마태 2,22-23). 이는 네 번째 꿈이었다.

요셉은 모든 상황에서, 주님 탄생 예고 때의 마리아와 겟세마니 동산에서의 예수님처럼 “그대로 이루어지소서.”(fiat)라고 말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요셉은 자신의 역할인 가장으로서 예수님께 하느님의 계명에 따라(탈출 20,12 참조) 부모에게 순종하도록(루카 2,51 참조) 가르쳤다. 나자렛에서의 감추어진 기간 동안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법을 요셉에게서 배웠다. 그분의 뜻은 일용할 양식이었다(요한 4,34 참조). 겟세마니에서 가장 힘겨운 시기를 보내고 있을 때조차, 예수님께서는 당신 뜻보다는 아버지 뜻을 따르기로 하시며,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8). 이 모든 사건을 통하여 “성 요셉은 직접 자기 부성의 실행을 통하여 예수의 인격과 사명에 봉사하도록 하느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다.”라는 것과 이렇게 하여 “충만한 때에 위대한 구원 신비에 협력하였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4. 수용하는 아버지

요셉은 아무런 조건 없이 마리아를 받아들였다. 요셉은 천사가 전해 주는 말을 믿었다. “요셉은 마음이 고귀해서 자신이 율법에서 배운 것보다 사랑을 중요하게 여겼다. 여성에 대한 정신적, 언어적, 신체적 폭력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는 오늘날 요셉은 존경할 만하고 섬세한 남성상으로 제시된다. 비록 요셉은 모든 내용을 알고 있지는 않았지만, 마리아의 명성, 존엄성, 삶을 보호하기로 한다. 요셉이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지를 고민하고 있을 때, 하느님께서는 그의 판단에 빛을 비추시어 도와주신다.”

요셉은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위하여 자기 생각은 제쳐 두고, 아무리 이해할 수 없는 일처럼 보일지라도 그 일을 받아들이고 그에 대해 책임지며 자기 역사의 일부로 만들었다. 요셉이 우리를 위하여 걸어간 영적 길은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렇게 수용하고 화해할 때만 우리는 더 큰 역사와 더 깊은 의미를 엿보기 시작할 수 있다. 요셉은 분명 수동적으로 굴복하는 사람이 아니라, 용기 있게 굳건한 의지로 상황을 주도하는 사람이다. 삶에 모순과 좌절과 낙담이 존재할지라도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에 필요한 힘을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주님뿐이시다.

요셉의 수용하는 태도는, 우리에게 예외 없이 다른 이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환대하며, 약한 이들에게서 특별한 관심을 보이라고 권유한다. 하느님께서는 약한 것을 선택하셨고(1코린 1,27 참조), “고아들의 아버지, 과부들의 보호자”[시편 68(67),6]이시며, 우리 가운데 있는 이방인을 사랑하라고 요청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돌아온 탕자와 자비로운 아버지(루카 15,11-32 참조) 비유에 관한 영감을 요셉 성인에게서 받았다고 생각한다.

5. 창의적 용기를 지닌 아버지

요셉은 참으로 신비한 사람으로 하느님께서는 그 아기와 어머니를 구한다. 하느님께서는 요셉의 창의적 용기를 믿으시고 활동하셨다. 요셉은 베들레헴에 도착해서 마리아가 해산할 만한 장소를 찾지 못하고 있을 때 외양간을 준비하고, 최선을 다하여 그곳을 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의 아드님을 따뜻하게 맞이할 장소로 바꾸었다(루카 2,6-7 참조). 헤로데가 그 아기를 죽이려는 절박한 위기 상황에서 요셉은 꿈에서 아기를 보호하라는 이야기를 듣고, 한밤중에 일어나 이집트로 떠날 채비를 하였다(마태 2,13-14 참조).

복음은, 하느님께서 세속 권력의 모든 오만과 횡포에도 언제나 당신의 구원 계획을 실행하시는 길을 찾으신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우리의 삶이 때때로 권력자들에게 휘둘리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복음은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알려 준다. 이는, 우리가 언제나 하느님의 섭리를 믿고, 어려움을 기회로 바꿀 수 있었던 나자렛의 목수와 같은 창의적 용기를 보여 준다면,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구원해 주신다는 것이다. 때때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분명 이는 우리가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께서 우리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창의적으로 생각하여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 믿으시는 것이다.

이러한 창의적 용기를, 지붕에서 중풍 병자를 내려 하느님 앞에 데려다 놓은 중풍 병자의 친구들이 보여준다(루카 5,17-26 참조). 어려움은 담대하고 끈질긴 친구들 앞을 가로막지 못하였다. 이 친구들은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낫게 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군중 때문에 그를 안으로 들일 길이 없어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 내고, 평상에 누인 그 환자를 예수님 앞 한가운데로 내려보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루카 5,19-20). 예수님께서는 아픈 친구를 당신 앞에 데려다 놓으려는 이들의 창의적인 믿음을 인정하셨다.

성가정은, 모든 다른 가정들처럼, 역경과 굶주림에서 벗어나고자 목숨을 걸고 탈출하는 우리의 형제자매인 많은 이민처럼, 전쟁, 증오, 박해, 빈곤 때문에 본국에서 강제로 쫓겨나는 많은 이들을 위한 특별한 수호자라고 믿는다. 예수님과, 그의 어머니 마리아는 우리 신앙의 가장 소중한 보배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서 성자를 그의 어머니, 곧 마리아와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마리아께서는 “신앙의 나그넷길을 걸으셨고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아드님과 당신의 결합을 충실히 견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온 힘을 다하여 예수님과 마리아를 언제나 보호하고 있는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그들은 우리의 책임과 보살핌과 보호에 신비롭게 맡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분의 아드님께서는 가장 나약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그분은 당신을 지켜 주고 보호하며 돌봐 주고 키워 줄 요셉이 필요하셨다. 마리아가 자신의 삶만이 아니라 언제나 자기와 아기를 부양할 수 있는 존재를 요셉 안에서 발견하였던 것처럼 하느님께서 요셉을 신뢰하셨다. 이러한 의미에서 요셉 성인은 교회의 수호자이시다. 마리아의 모성이 교회의 모성에 반영된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의 연장선이기 때문이다. 요셉이 끊임없이 교회를 보호하면서, 그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보호하고 있다. 우리도 교회를 사랑하면서 그 아기와 그 어머니를 끊임없이 사랑하여야 한다.

그 아기는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라고 말씀하시게 될 분이다. 따라서 모든 가난한 이들, 도움이 필요한 이들, 고통받는 이들, 죽어가는 이들, 이방인들, 수감자들, 아픈 이들이 요셉이 끊임없이 보호하여야 하는 아이이다. 이러한 이유로, 요셉 성인은 불행한 이들, 도움이 필요한 이들, 추방당한 이들, 고통받는 이들, 가난한 이들, 죽어가는 이들의 수호자로 불린다. 그렇기에 교회는 우리의 형제자매인 가장 작은 이들에 대한 특별한 사랑을 보여 주지 않을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셨고, 그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셨다. 우리는 요셉 성인에게서 그 같은 보호와 책임감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그 아기와 그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을 배워야 하고, 교회와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이러한 실재들 하나하나가 언제나 그 아기와 그의 어머니이다.

6. 노동하는 아버지

요셉 성인은 목수로 정직하게 일하며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노동의 결실로서 양식을 얻는다는 것의 가치, 고귀함, 기쁨을 요셉에게서 배웠다. 노동은 구원 활동에 참여하는 수단이며,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을 앞당기고, 우리의 잠재력과 능력을 발전시키며 사회와 형제적 친교를 위하여 그 잠재력과 능력을 발휘할 기회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노동하는 이들은 하느님과 협력하고, 어떤 면에서는 우리 주변의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다. 우리 시대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영적 위기는, 그 누구도 제외되지 않는 새로운 일상을 만들 수 있도록 우리가 모두 노동의 가치와 중요성과 필요성을 재발견하라는 요청일 수 있다. 요셉 성인의 노동은, 몸소 사람이 되신 하느님께서 노동을 업신여기지 않으셨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우리의 많은 형제자매에게 영향을 미치고 또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증가한 실직은 우리가 우선시하여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살펴보라는 요청이다. 노동자이신 요셉 성인께, 그 어떤 젊은이도, 그 어떤 사람도, 그 어떤 가정도 노동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우리의 확고한 신념을 표현할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도움을 달라고 간청하자!

7. 그림자 속에 있는 아버지

폴란드 작가 얀 도브라친스키(Jan Dobraczyński)는 저서 「아버지의 그림자」(The Shadow of the Father)를 통하여 소설 형태로 요셉 성인의 삶을 표현한다. 그는 그림자의 좋은 이미지를 이용하여 요셉을 정의한다. 요셉과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요셉은 하느님 아버지의 지상의 그림자였다. 요셉은 예수님을 지켜보고 보호하며 예수님께서 혼자 길을 가도록 두지 않았다. 모세가 이스라엘에 한 말을 떠올려 보자. “너희는 마치 사람이 제 아들을 업고 다니듯,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가 이곳에 다다를 때까지 걸어온 그 모든 길에서 줄곧 너희를 업고 다니시는 것을 광야에서 보았다.”(신명 1,31). 이와 비슷하게 요셉은 살아가면서 부성을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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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들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단순히 아이를 낳는다고 해서 아버지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아이를 돌보겠다는 책임감을 느껴야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다른 이의 삶에 대한 책임감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그 사람의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오늘날 어린이들은 아버지가 없는 고아들처럼 보인다. 교회도 아버지들이 필요하다. 바오로 성인께서 코린토 신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여전히 옳다. “여러분을 그리스도 안에서 이끌어 주는 인도자가 수없이 많다 하여도 아버지는 많지 않습니다”(1코린 4,15). 모든 사제는 바오로 사도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내가 복음을 통하여 여러분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1코린 4,15). 바오로 사도는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의 자녀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모습을 갖추실 때까지 나는 다시 산고를 겪고 있습니다”(갈라 4,19).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자녀들에게 삶의 경험과 현실을 접하게 해 주는 것이다. 자녀들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녀들이 스스로 결정하고 자유를 누리며 새로운 기회들을 찾아 나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것이 아마도 요셉을 가장 순수한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일 것이다. 소유욕이 강한 사랑은 결국 언제나 위험하다. 그러한 사랑은 구속하고 옥죄며 불행하게 만든다. 하느님께서는 순수한 사랑으로 인류를 사랑하셨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자유로이 두시어 우리가 심지어 방황하거나 그분께 맞서도록 두셨다. 사랑의 논리는 언제나 자유의 논리이다. 그리고 요셉은 특별한 자유로써 사랑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요셉은 결코 자기중심적이지 않았다. 요셉은 자신에게 집중하지 않고, 오히려 마리아와 예수님을 자기 삶의 중심에 두었다.

요셉은 단지 자기희생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자기를 기꺼이 내어줌으로써 행복을 누린 분이었다. 우리는 요셉에게서 믿음을 본다. 오늘날 이 세상은 아버지가 필요하다. 자신의 욕구를 채우려고 다른 이들에게 위세를 부리는 것은 필요 없다. 모든 참된 성소는 자기 자신을 기꺼이 내어주는 것, 곧 성숙한 희생의 결과로 생겨난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성숙함은 사제직과 축성 생활에서도 필요하다. 우리의 성소가 혼인이든지 독신이든지 동정이든지 상관없이 희생에서 그친다면, 우리 자신을 기꺼이 내어주는 것은 실현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경우 우리 자신을 기꺼이 내어주는 것은, 사랑의 아름다움과 기쁨의 표징이 되는 것이 아니라, 불행과 슬픔과 좌절을 보여 주는 위험에 빠지게 된다.

아버지들이 자녀들의 삶을 자신들을 위하여 살도록 하려는 유혹을 뿌리칠 때 예상 밖의 새로운 앞날이 열린다. 모든 자녀는, 자녀의 자유를 존중하는 아버지의 도움을 받을 때만 드러낼 수 있는 특별한 신비가 있는 존재이다. 아버지는 자신이 무용해졌을 때 비로소 아버지와 교육자의 역할을 다하였다고 깨닫는다. 바로 자녀가 자립하여 자기 삶의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볼 때, 그리고 자녀가 자신의 소유물이 아니라 자신의 보호에 그저 맡겨져 있었던 것뿐이라는 것을 언제나 알고 있었던 요셉의 입장이 되었을 때이다. 결국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면서 우리를 이해시키려고 하셨다.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마태 23,9).

부성을 보여 주어야 할 때 소유가 아니라 더 큰 부성을 보여 주는 표징이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분명 어떠한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요셉과 같다. 요셉은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시는”(마태 5,45)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그림자이며, 성자를 따라가는 그림자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이 위대한 성인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키우고 그분의 전구를 청하며 그분의 덕행과 열정을 본받으라고 초대하신다. 우리는 요셉 성인에게 은총들 가운데 은총, 곧 우리의 회개를 위하여 도움을 요청하여야 한다. 그리고 요셉 성인께 이렇게 기도하자.

구세주의 보호자시며,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시여.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외아드님을 맡기셨고, 마리아께서는 당신을 신뢰하셨으며,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보호 속에서 성장하셨나이다.
복되신 요셉이시여, 저희에게도 아버지가 되시어, 삶의 여정에서 저희를 이끌어 주소서. 저희를 위하여 은총과 자비와 용기를 얻어 주시고, 모든 악에서 저희를 지켜 주소서. 아멘.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교황 재위 8년
원죄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2020년 12월 8일


프란치스코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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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김광시 | 작성시간 21.03.05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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