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당신 백성을 당신의 지팡이로 보살펴 주소서
미카 7,14-20; 루카 15,1-32 / 사순 제2주간 토요일; 2021.3.6.; 이기우 신부
오늘 독서에서 미카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하느님께 간절한 소망을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과수원 한가운데 놓인 양 떼처럼 강대국들 틈바구니에서 부대끼고 있는 이스라엘을 보호해 달라고
탄원하는 것이고, 그래도 마치 숲속에 홀로 살아가는 듯 하느님을 섬기는 무리로서는 독보적인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기시어 그 옛날 이집트 손아귀에서 탈출시키실 때처럼 놀라운 일을 보여 달라고 탄원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미카 예언자가 간절하게 탄원한 그 소망대로 하느님께서
당신의 지팡이로 당신 백성을 이끄시고 자비를 베푸실 미래에 대해 돌아온 아들의 비유로 계시하셨습니다.
유감스럽게도 미카가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달라고 청했던 이스라엘의 죄악을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
같은 이스라엘의 우두머리들은 버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기들 가운데 오신 메시아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배척할 음모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세리와 죄인으로 취급받던 유다인들이 메시아를 알아보고
그분의 백성이 되겠다고 그분 주위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습니다.
이 비유는 루카 복음사가가 소개하는 되찾은 비유 이야기들 가운데에서
사람들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흔히 탕자의 비유로도 불려온 이 이야기의 초점은 바로 아버지의 자비입니다.
이를 잘 표현한 사람이 ‘빛의 화가’라고도 불리는 렘브란트(1606~1669)입니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아직 많은 사람들이 직접 라틴어로 번역된 성경을 읽기 어렵던 시대에
그는 성경을 깊이 묵상한 후에 말씀에 담긴 뜻을 꿰뚫어 보는 안목으로 그림을 그려서 그 바로크 시대는
물론 지금까지도 이 그림을 보는 이들에게 오늘 복음을 말씀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그의 작품에서도 초점은 돌아온 아들이 아니라 그를 기다리다가 맞이하는 아버지에 있습니다.
그림에 그려진 아버지는 기다리다가 지쳐서 멀어버린 듯한 눈에다가, 그의 왼 손은 거친
아버지의 손이지만 오른손은 소담한 어머니의 손으로 그려져 있어서 기형적으로 보이기까지 합니다.
이를 보는 사람들은 즉시 그 화가가 그리려 했던 하느님의 자비가 아버지의 마음과
어머니의 마음을 담고 있음을 표현하려 했던 의도를 눈치챌 수 있었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이나 큰 아들, 하인 등 나머지 등장인물들은 다소 어둡고 흐리게 묘사되어 있는데,
죄악의 어둠을 대변하는 듯이 보입니다.
복음을 선포하신 활동과 세상의 반응을 담은 이 비유에 드러나 있듯이,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실 때 만나신 사람들은 크게 보아 두 부류였습니다.
그분을 기다리다가 환영해 주고 맞이한 첫째 부류는 비유에 나오는
둘째 아들처럼 죄인으로 낙인찍혀서 고생하며 소외되었던 이들로서,
세리와 창녀들을 비롯하여 온갖 질병을 앓거나 마귀 들려서 고통 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비주류(非主流)로 취급받던 사람들에게 갈릴래아에서는 당신께서
직접 선포하기도 하셨고 제자들을 시켜서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복음을 선포하게도 하셨는데,
이들이 하느님께 돌아오자, 예수님께서는 기쁘게 맞이하셨고 기꺼이 용서하시는 뜻으로
‘신발’을 신겨주셨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로 받아들여주시는 뜻으로 ‘반지’도 끼워주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의 주류를 자처하면서, 율법을 글자 그대로 철저하게 준수하던
바리사이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며 경건하게 처신하던 사두가이들은 자신들과 달리
살아가던 죄인들을 가까이하고 어울리시던 예수님의 처신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메시아로 대접하기는 고사하고 율법을 어긴다고 험담을 하거나
마귀에 들려 기적을 일으킨다고 중상모략을 하기도 했으며, 종내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버렸습니다.
이들에게는 관용을 찾아보기 어려웠으며 더군다나 하느님의 자비를 배우려는 생각조차 아예 없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폐막된 지 50년이 되던 지난 2016년에 모두가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을 닮자”(에페 2,4)는 취지로 ‘자비의 희년’을 선포하면서,
‘자비의 얼굴’(Misericordiae Vultus)이라는 제목의 회칙을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에게 반포하였습니다.
이 희년 선포 미사에서 교황은, “지금은 자비의 시대입니다.
평신도들이 자비를 실천하고 다양한 사회 환경에서 자비를 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하고 강론하였습니다. 또한 회칙에서는,
배고픈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이들에게 마실 것을 주며, 헐벗은 이들에게
입을 것을 주고, 나그네들을 따뜻이 맞아주며, 병든 이들을 돌보아 주고,
감옥에 있는 이를 찾아가 주며, 죽은 이를 묻어 주는 육체적 자비 활동을 먼저 강조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전통적 자비 활동에 더하여 새로운 강조점을 보탰는데 그것은,
“의심하는 이들에게 조언하고, 모르는 이들에게 가르쳐 주며, 죄인들을 꾸짖고,
상처받은 이들을 위로하며, 우리를 모욕한 자들을 용서해 주고,
우리를 괴롭히는 자들을 인내로이 견디며, 산 이와 죽은 이를 위하여 기도해 주는 활동에
나서달라고 호소한 메시지입니다. 이 새로운 호소는 영적인 자비 활동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황의 이 호소는 하느님의 자비를 보여주신 예수님의 지팡이입니다.
새로운 메시아 백성으로 불림 받은 우리가 이 지팡이가 가리키는 자비를 외면하게 되면,
그것이 또 다른 죄를 저지르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육체적이고도 영적인 자비를 베푸는 길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강대국들의 과수원 한가운데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대신 패권 추구에
골몰하는 숲속에 홀로 살아가는 듯한 우리 교회와 우리 민족이 하느님의 자비를 받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