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선택, 기준과 목표를 제시함
2열왕 5,1-15; 루카 4,24-30
사순 제3주간 월요일; 2021.3.8.; 이기우 신부
하느님께서는 생명을 지어주신 창조주이시며 또한 생명을 완성하실 심판주이십니다.
이 창조 신앙이 기준이며 심판 신앙이 목표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기준과 목표를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셨으며,
몸소 그 기준에 따라 목표를 성취하시는 삶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사물을 헤아릴 때 쓰는 숫자의 기준은 0과 1이며 그 완성은 10인 것과 같고,
원(圓)이라는 도형을 그려서 완성하자면 반드시 그 중심에 점을 찍고 그 점을 기준으로 같은 길이로 둘레를 그려야 하는
이치와도 같습니다. 이러한 이치를 한 번만 가르쳐주면 우리는 얼마든지 필요한 대로 필요한 경우에 응용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엘리야 시대에 가뭄이 심하게 들어 모두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을 때
시돈의 과부 사렙타에게 엘리야를 보내시어 음식이 떨어지지 않고 죽은 아들이 살아나는 기적을
보여주심으로써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표징을 보여 주셨고, 엘리사 시대에는 나병에 걸린
시리아 장군 나아만을 이스라엘에 보내시어 엘리사로 하여금 요르단 강물로 그를 낫게 해 주시는
기적을 보여주심으로써 또한 그 시대 사람들에게 표징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 두 표징의 공통점은 하느님의 자비와 말씀에 의탁하면,
굶주림이든 나병이든 나을 수 있다는 메시지였습니다.
그런데 엘리야 시대의 시돈 사람들이나 엘리사 시대의 시리아 사람들도
회개하지 않았고 하느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도 카파르나움을 비롯한 갈릴래아 지방 여러 고을에서 기적을
일으키시며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으며, 당신께서 자라나신 고향 나자렛에서도 마찬가지로
복음을 선포하셨는데 고향 사람들은 카파르나움에서 보여준 기적을
또 다시 자신들의 눈 앞에서 보여달라고 억지를 부리며 그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회개하거나 믿기는커녕 예수님을 벼랑에까지 끌고가서 떨어뜨려 죽이려고까지 하는 적개심을 보였습니다.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익히 보아온 예수님께서 설사 기적을 일으키셨다고 해도
그분을 메시아로 인정하는 것이 고까웠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예수님께서는 엘리야 시대와 엘리사 시대에 있었던 옛 일을 상기시키며
복음선포를 포기하고 물러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그 어떠한 기적도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었고,
설사 그네들의 요구대로 기적을 그들 눈앞에서 일으킨다 해도 믿지 않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듯 사납고 살벌해진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무사히 빠져나오셨습니다.
그들의 적개심에 굴복하는 것은 결코 짊어질만한 십자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옷자락에도 손을 대지 못했습니다.
이 기적 같은 탈출이 그분의 공생활 내내 사람들의 불신과 냉소
그리고 무관심에 부딪치실 때마다 일어났습니다(요한 7,30.44; 8,59; 10,31).
하지만 진정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사람들의 믿음이었습니다.
그것은 기적을 일으키실 수 있는 그분의 신적인 권능으로도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셨을 때 목이 말라 물을 청하신 그분은,
정작 그 여인의 믿음에 목마르신 것이었으며 따라서 그 영적인 갈증을 해소하시려고
믿음의 물을 청하신 것이었고(요한 4,7), 그 믿음이야말로 그분이 배고프지 않을 수 있는
‘양식’(요한 4,32)이었는데, 제자들은 이 사실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분이 십자가 상에서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목 마르다”(요한 19,28) 하고 말씀하신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믿으면 결코 마르지 않는 생명의 물처럼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물을 마시면 우리는 다시는 갈증에 시달리지 않아도 됩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제 영혼이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 하나이다.
하느님의 얼굴을 언제나 가서 뵈오리이까?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그리나이다”(시편 42,2-3. 화답송). 그래서 우리는,
“주님 없이는 교회가 온전히 서 있을 수 없사오니 언제나 주님의 은총으로 교회를 이끄시고
무한하신 자비로 깨끗하게 하시어 저희를 보호하소서”(본기도) 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눈치를 챈 제자들이 스승이신 예수님께,
“주님, 저희의 믿음을 더해 주십시오”(루카 17,5) 하고 청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성령과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은
그분이 우리 삶의 기준이시며 또한 완성이심을 깨닫게 해 줍니다.
이 깨달음과 믿음을 위해서 이미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 자녀로 선택해 주셨습니다.
비록 우리 눈앞에서 사렙타 과부에게 일어난 일이 벌어지지 않아도,
또한 시리아 장군 나아만 같은 나병환자가 깨끗하게 낫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아도,
우리는 그 일들이 성경에 기록되고 우리에게 전해지는 것만으로도 우리 역시 성령을
받을 수 있도록 선택되었으며 우리의 믿음을 하느님께서 바라신다는 것을 얼마든지 믿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선택은 삶의 기준과 완성을 표징으로 보여주신 것으로 우리에게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실질적으로 생명을 받아 태어난 이들 모두가 그분의 자비와 사랑을 무상으로
그것도 필요한 때에 필요한 만큼 받고 있는 현실이 그 근거입니다.
거저 주어진 이 은총을 알아보는 눈이 그래서 귀합니다.
기준이 모호하고 목표가 없는 삶은 겉모습이 아무리 그럴듯해도 좋은 삶이라 할 수 없습니다.
정확한 기준과 확실한 목표, 그리고 믿을 만한 모범을 따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