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당신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소서
다니 3,25-43; 마태 18,21-35 / 사순 제3주간 화요일; 2021.3.9.; 이기우 신부
오늘 독서는 바빌론 유배시대에 바빌론 임금 네브카드네자르가 금으로 만들어 놓은
신상(神像)에 유다인 아자르야가 엎드려 절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불가마 속에 내던져졌는데,
그 속에서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의 기도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용서하라는 가르침을 들은
베드로가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하는지를 예수님께 여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는 말씀과 함께 무자비한 종의 비유 이야기를 답변으로 해 주신 말씀입니다.
아자르야와 그의 두 동료들은 신상에 절하지 않겠다면
불가마 속에 던져져 죽이겠다는 임금에게 태연자약하게 대답하였습니다.
즉, 자신들이 섬기는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구해 내고자 하시면,
얼마든지 타오르는 불가마와 임금의 손에서 자신들을 구해 내실 것이지만,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자신들은 임금의 신들을 섬기지도 않고,
임금이 만든 금 신상에 절하지도 않을 터이니 그리 알라는 것이었습니다(다니 3,17-18).
참으로 배짱두둑한 이러한 태도는 하느님께 대해서 철두철미한 신앙에서 나왔을 터입니다.
이렇듯 단단히 각오를 하고 나서 불가마 속으로 던져진 아자르야는 그 한가운데에
우뚝 서서 마지막 기도를 바쳤는데, 그 내용을 보면 자신들을 살려달라는 청원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과 맺으신 계약을 기억하여 포로로 끌려와 있는 민족을 구해 달라는 탄원이었습니다.
이를 위해서라면 자신들의 목숨이라도 제물로 받아서 하느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시라는 기도였습니다.
자신들의 안위(安危)와는 상관없이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철썩같이 믿는 마음이 진하게 담겨 있는 기도였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용감하고 담대한 믿음을 드러내는 아자르야의 찬미 기도를
통해서 믿는 이가 어떻게 하느님을 흠숭해야 하는지에 대한 전형적인 태도를 봅니다.
자기 목숨을 보존하는 것이 기준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제물로
삼아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을 기준으로 삼아 박해에 임했습니다.
결국 아자르야와 그의 동료들은 하느님의 보호하심으로 뜨거운 불가마 속에서
기적적으로 구출되었을 뿐만 아니라 바빌론으로 끌려온
유다인 포로들 모두가 바빌론 제국 안에서 신앙생활을 자유로이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시며
하느님 나라가 다가오도록 청할 것과 우리에게 잘못을 저지른 이들을 용서할 것을
가르치셨던 것을 기억하는 베드로가 과연 몇 번까지 용서하면 되겠는지를 여쭈었던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는 어쩌면 자신에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머릿속에 떠올리면서 동시에 그로 인해 자신이 받았던
상처까지도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해야 한다는 도덕적 부담감을
느끼면서 질문을 한 것 같습니다. 아무튼 베드로의 관점은 자기중심적인 것이었고,
잘못을 저지른 상대방에 비해 상대적으로 도덕적 우위에 있는 자신의 의로움을 기준으로 한 질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관점은 하느님의 자비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었으므로
용서해야 할 횟수는 의미가 없는 것이었고 필요하다면 끝까지 용서해야 한다는 뜻으로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관점은 이어지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 이야기에서 잘 드러납니다.
그분은 철두철미 하느님 나라의 관점에서 용서하기를 요청하셨으므로,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자비의 무한함에 대해 강조하셨습니다.
이러한 강조가 비유 속에 담긴 탈렌트와 데나리온이라는 화폐 단위의 차이와
죄나 잘못을 채무로 보는 시각으로 드러나 있습니다. 우선 화폐 단위의 차이를 보면,
하느님께서는 만 탈렌트나 되는 큰 빚을 진 우리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셔서 탕감해 주셨는데,
우리는 백 데나리온밖에 안 되는 작은 빚도 탕감해 주는 데 인색하다는 것입니다.
한 탈렌트가 6천 데나리온이므로, 만 탈렌트는 6천만 데나리온입니다.
한 데나리온이 그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으니까,
만 탈렌트는 6천만일의 일당에 해당하는 거액이었습니다.
일년에 3백일을 일한다고 어림잡아 쳐서 계산해도 이 돈은 20만 년 동안 일해야 벌 수 있는 어마어마한
큰 돈입니다. 백 년도 채 못 사는 인간이 도저히 벌 수도 없고, 따라서 갚을 수도 없는 거액입니다.
그 다음 죄나 잘못을 채무로 보는 시각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주 하느님을 닮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이시므로 그분을 닮자면 인간도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사랑하지 못하고 죄를 저지르거나 잘못을 범하면, 이는 하느님께 빚을 지는 셈이라는 것입니다.
닮아야 할 존재가 닮기는커녕 더욱 멀어지는 형국이기 때문에,
우리 힘으로는 다가가기 어렵고 하느님께서 끌어당겨주셔야 하는 처지입니다.
이를 예수님께서는 ‘탕감’(蕩減)이라는 말로 표현하셨습니다.
그래서 용서야말로 하느님의 자비를 닮는 일로서, 채무 이행의 사도직입니다.
이를 뒤집어보면, 우리의 작은 용서 행위가 어마어마한
하느님의 자비를 이끌어내는 마중물이 될 수도 있다는 뜻도 됩니다.
요컨대, 독서 말씀에서는 하느님과 인간의 수직적인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가 드러난다면,
복음 말씀에서는 하느님을 믿는 이들 사이에서의 수평적인 인간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가 드러납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관계에서도 하느님과 우리가 맺는 관계가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과 그분의 나라를 기준으로 삼는 삶의 태도가 요청됩니다.
하느님께 대해서도 그렇고, 인간관계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박해를 받아도 그러하고, 용서를 하려 해도 그러합니다.
“주님, 당신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