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나라의 큰 사람, 큰 민족
신명 4,1.5-9; 마태 5,17-19 / 사순 제3주간 수요일; 2021.3.10.; 이기우 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 의하면,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정해 주셨고,
예수님께서는 사랑으로 이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으로 완성된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이 될 것이요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도록 가르치는 민족은 하늘 나라에서 큰 민족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본시 이 율법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맺은 계약의 조건으로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당신 백성으로 삼으시고 보호해 주시는 대신에
이스라엘 백성은 이 율법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지켜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빛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만민에게로 퍼져나가기를 기대하셨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스라엘은 예수님께서 오시기까지 하느님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이 율법을 폐지하러 오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율법의 본 정신인 사랑을 가르치고 솔선수범하심으로써 율법을 완성하여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서 이스라엘을 하늘 나라의 큰 민족이 되게끔 이끄시고자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예수님의 이러한 뜻을 몰라보고 그분을 배척했기에 그분은 죽음을 당하실지언정,
이스라엘 민족 안에서 골라 뽑으신 열두 제자라도 하늘 나라의 큰 사람이 되게끔 양성하셨습니다.
그들이 주춧돌이 된 새로운 하느님 백성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서 서방으로 복음을 전파하여 온 세상에
교회를 세웠고, 교회는 그리스적 사유를 받아들여 신앙을 뿌리로 하는 인간 이성을 꽃피우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여 일어난 서양 문명은 엉뚱하게도 무신론적인 경향을 다분히 띠고 말았습니다.
이에 대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현대 서양문명을 이렇게 평가하였습니다:
“현대에 있어서 인류는 자신의 발명과 자신의 능력을 경탄하면서도 세계 발전의 현상,
우주 안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위치와 역할, 개인 노력과 집단 노력의 의의,
사물과 인간의 궁극 목적 등에 관한 안타까운 문제들로 자주 번민하게 된다”(사목헌장, 3항).
이 땅에 들어온 교회도 2백 년을 훌쩍 넘어가는데, 아직도 서양 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민족의 사상과 전통, 문화와 풍습에 뿌리내려 복음화를 이룩하기가 그토록 어려운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율법을 통해서 말씀하신 것처럼,
한민족에게는 자연과 인간에 대한 심오한 사색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물줄기가 아브라함과 야곱과 모세를 통해 흘러왔듯이 한민족의 물줄기는
환인과 환웅과 단군 세 왕조의 흐름으로 흘러왔는데, 이 흐름을 사상적으로 간추리면
자연에 대해서는 태극(太極)이요 사람에 대해서는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를 주요 줄기로 합니다.
태극 사상은 자연을 관찰한 결과로서 천지만물의 궁극적 이치를 음양의 이치에서
시작하여 8괘(卦)를 거쳐 64괘의 변화 즉 역(易)으로 풀고자 하는 우리 민족의 우주관입니다.
그리하여 이 사상에는 태초로부터 궁극에 이르는 시간의 의미, 인체라는 소우주와
대우주 전체 공간의 의미와 함께 우주 만물이 생성되고 변화되는 원리가 담겨 있습니다.
또한 삼재 사상은 인간은 하늘의 기운을 받아 땅을 다스리는 존재로서 하늘과 땅 사이에
가장 귀한 존재라는 영적 자각이 들어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사상은 인류와 만물이 함께 살아가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는
인본주의 이념으로 구체화되었는가 하면, 태극기로 상징되어 겨레의 삶 속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민족 사상의 이 원류(源流)는 개인의 완성과 공동선을 함께 추구함으로써
공동체가 어우러지게 하여서 궁극적으로는 천지가 합일되기를 지향합니다.
그리하여 태극의 문양(紋樣)은 옛적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태극기를 비롯하여
의식주 문화와 풍습 안에 깊이 스며들어왔고, 천지인은 한글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우리 민족의 복음화 과업에 있어서는 두 가지 과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아직도 정신적으로 서양 일색으로 치장하고 있는 우리 교회와 신앙인들이
우리 민족의 전통과 역사, 사상과 사유를 배우고 이해하여 토착화의 세례를 받는 일입니다.
우리 교회가 몸은 그리스도의 몸이되 옷은 한국인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민족 사상의 이 원류가 한민족의 혼(魂)을 빼앗으려던 일제에 의해
미신(迷信)으로 천시(賤視)되었던 굴절된 과거를 청산하고, 이스라엘의 율법이 사랑으로 완성되어야
했던 것처럼 사랑으로 완성될 수 있도록 인격적인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세례를 받게 하는 일입니다.
혼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영(靈)과 결합되어야 영혼(靈魂)이 되어 온전해 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 과제는 한민족 사상과 그리스도교 사상이
상호 세례를 받고 상호 간에 대화하는 한 가지 과제로 귀결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민족도 하늘 나라의 큰 민족이 되어 하느님의 뜻을 인류에게 가르치는
큰 민족이 되고, 우리 교회도 하느님의 뜻을 스스로 지키는 하늘 나라의 큰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민족과 인류 복음화를 위해서 대화를 당부한 교부들의 메시지로 마칩니다.
“그러므로 공의회는 그리스도께서 모으신 하느님의 백성 전체의 신앙을 증거하고 해명하는 동시에,
이런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서 인류와 더불어 대화를 나누며 복음의 빛으로 해명해 주고,
교회가 성령의 인도로 그 창립자로부터 받은 구원의 힘을 인류에게 풍부히 제공해야만,
하느님의 백성이 속하여 있는 인류 가족 전체에 대한 연대성과 존경과 사랑을 가장 웅변적으로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구원되어야 하겠고 인간 사회는 쇄신되어야 하겠다”(사목헌장, 3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