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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경호 신부 강론

방효익 바오로 신부 - 연중 제 14주일 22 07 03

작성자제이짱|작성시간22.07.02|조회수154 목록 댓글 1

연중 제14주일(다해)


제1독서(이사 66,10-14ㄷ)는 유배를 벗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들의 기쁨을 노래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바빌론 유배 중에 있는 이들을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 산고를 겪어 보지 못한 여인“(54,1), 그리고 “소박맞아 마음 아파하는 아내”, “퇴박맞은 젊은 시절의 아내”라고 부르셨습니다(54,6). 남편인 하느님을 버리고 우상숭배로 놀아났기에 바빌론 유배를 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유다인들에게 하느님께서는 “산들이 밀려나고 언덕들이 흔들린다 하여도 나의 자애는 너에게서 밀려나지 않고 내 평화의 계약은 흔들리지 아니하리라.”(54,10)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새롭게 창조된 예루살렘(65,18)을 기쁨과 즐거움으로 여기면서 그곳에 평화의 강물을 끌어들이겠다고 하십니다. 제3이사야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예루살렘을 어머니로, 유배에서 돌아온 이들을 어머니의 젖을 빠는 어린 아기로 묘사하면서 예루살렘 도시와 성전의 재건은 물론 하느님의 백성이 불어나는 기쁨을 말합니다. 재건된 도시와 성전에서 하느님을 잘 섬긴다면 유다인들은 마치 어머니의 품에 안겨 위로를 받으면서 젖을 빠는 어린이처럼 평화로울 것이고, 어머니 앞에서 뛰노는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와 같이 기쁨이 넘칠 것이라고 합니다. 유배에서 벗어나 새롭게 창조된 아내인 이스라엘이 맛보는 신랑이신 하느님의 선물은 바로 어머니가 사랑하는 자식에게 주는 위로와 평화이며, 하느님의 사랑을 받도록 사는 이들에게 아버지이신 주님의 손길이 드러난다고 합니다.

복음(루카 10,1-9)은 예수님께서 일흔두 명의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 선포와 병자의 치유를 위해 모세처럼(민수 11,16-17) 일흔두 명을 사마리아(9,52)와 당신께서 가시려는 모든 고을에 파견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기쁜 소식을 간절히 기다리는 이들이 사랑의 기쁨을 누리게 해주시려고 자비하신 예수님께서는 “곡식이 다 익어 수확 때가 되었기”(요한 4,35) 때문에 제자들을 둘씩 파견하신 것입니다(신명 19,15). 안전을 위해 둘씩 파견하기에 앞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기도할 것을 권고하십니다. 파견 받은 이들이 온전히 하느님께 의탁하라는 것이며 동시에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함을 깨우쳐주십니다. 온순한 어린양과 같은 제자들이 먼저 하느님의 뜻을 잘 헤아릴 수 있어야만 위험(이리떼)이 많은 곳에 가서도 하느님 나라를 잘 선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주십사고 청하여라” 하신 것은 비록 수확할 것이 많을 지라도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아는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청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아는 일꾼들은 예수님의 파견이 비록 두려울지라도, 여러 가지 제약과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라도 어디든지 힘차게 갈 수 있어야 합니다(예레 1,7).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라.”(12,4-5)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흔두 명의 제자들에게도 열두 제자들에게 하셨던 것처럼(9,3)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인사하느라고 지체하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당시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처럼 하지 말고, 비록 조건이 열악할지라도 떠돌이처럼 살지 말고, 예수님께서 하셨던 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이미 열두 제자들을 파견하셨던 경험을 바탕으로 하느님의 다스림을 잘 선포한다면 평화와 안전이 보증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면서 기쁨과 즐거움을 주지는 못할망정 양떼를 흩어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11,23). 훗날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들에게 “내가 너희를 돈 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없이 보냈을 때, 너희에게 부족한 것이 있었느냐?” 하고 물으시자 제자들은 “아무것도 없었다.”(22,35)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뜻대로 한다면 나머지는 하느님께서 채워주실 것이니(마태 6,33), 하느님만 믿고 떠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다스림을 잘 선포하려면 한 집에 머무르라고 하십니다. 당시에 집이란 복음이 선포되는 성전과 같은 곳이었으며, 한 집에 머물러 있으라는 것은 의식주의 조건을 가지고 쓸데없는 경쟁적 분위기를 조성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속적인 것에 마음을 빼앗길 위험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한편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들을 돕고 싶지만, 형편이 닿지 않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사람들을 배려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집에 들어갈 때마다 하느님 나라의 표징인 평화를 빌어주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현존과 은총은 물론 그 집안의 안녕을 뜻하는 평화를(1사무 25,6) 받아들이면 그 집은 하느님의 자녀로 산다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을 배척할 것이므로 그 평화가 복음 선포자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병자들을 고쳐주면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라는 것은 자비하신 하느님의 다스림이 곧 시작될 것이고, 그분의 왕권은 예수님과 함께 임하는 것이므로 아무도 막을 수 없고 단지 받아들이느냐 아니냐만 남았다는 것입니다.

제2독서(갈라 6,14-18)는 율법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십자가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바오로는 하느님을 위하여 살려고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자랑합니다(2,19; 1코린 2,2). 바오로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세상을 이용해서 누릴 수 있는(1코린 7,31) 명예와 영광과 관련된 모든 것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인이라면서 허우대만 멀쩡한 자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받는 박해를 모면하려고(6,12) 갈라티아 공동체 안에서 할례를 강요하기 때문에 바오로가 화가 난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이들에게 십자가는 단지 걸림돌일 뿐입니다(5,11). 할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5,6) 바오로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얻은 낙인 때문에 예수님의 종이 되었으며(2코린 4,5),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1코린 18-31). 그래서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산다고 합니다(2코린 4,10).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일이(필리 3,10)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간을 위한 사랑 때문에 감당해야 하는 희생과 죽음의 표지입니다. 우리가 받은 세례는 바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처럼 새로운 창조를 위해 세상의 소유가 되는 것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소유가 되는 새로운 창조입니다(2코린 5,17). 그런데도 아직도 율법과 할례 타령만 하고 있으니 답답해서 외치는 것입니다.

복음은 즐거움의 원천이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사심 없이 하느님의 다스림(나라)을 선포해야 합니다. 이리떼 가운데 사는 양들을 흩어버리지 말고, 그들에게 기쁨과 평화를 심어주어야 합니다. 물론 부족한 이가 복음을 선포할지라도 그것을 사람의 말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2테살 2,13). 복음을 받아들인다면 하느님의 다스림에 따르면서 그분께서 주시는 평화와 자비는 물론 영적으로 성숙됨을 체험하기에 기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아무런 감흥이 없습니다. 이런 이들에게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처참한 일이며 매일 걸림돌을 만날 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내게 구원의 기쁨을 가져다주는 엄청난 사건이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복음 선포자는 자기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기 위해 일상생활에서의 떠남이 필요합니다. 이 떠남은 누구와의 만남을 위한 것일 수도 있지만, 자기 수양을 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자랑이란 반드시 상대가 앞에 있어야 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랑거리가 향기를 풍기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십자가를 자랑하려면 거기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닮아야 하고, 그분과 함께 고난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것을 두려워하지(필리 3,9-10)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쉽게 신앙생활을 하려는 나머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니라 자기를 드러내려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약할 때 오히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강하게 된다(2코린 12,10)는 역설을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래서인지 오늘날 신앙생활에서 겸손, 극기, 희생, 봉사라는 말이 없어졌습니다. 아예 이런 단어들을 입에 올리기조차 싫어합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자비와 평화가 함께 하기 때문에 어머니 품에서 위로를 받는 갓난아기처럼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기쁨이 없다면 하느님을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기쁨이 없는 데도 하느님을 떠나지 않는다면, 형식과 체면이 중요하거나 습관이라서, 하느님의 심판이 두려워서 그러는 것 그 이상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기름이 부어졌기 때문에 하느님의 소유가 되는 낙인(인호)이 새겨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에게서 기쁨을 찾아내야 합니다. 하느님 안에서 기쁨을 찾지 못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하거나 증거할 수 없습니다. 증거자가 없는 그런 공동체는 쉽게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 방효익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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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발아래 | 작성시간 22.07.03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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