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4주일(가해)
제1독서(스바 2,3; 3,12-13)는 의로움과 겸손을 갖추라고 합니다.
스바니아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파멸(기원전 587년)이 있기 불과 5-60년 전에 하느님의 법규를 잘 실천하는 이들에게 의로움과 겸손을 찾으라고 외칩니다. 이민족이 쳐들어올 때, 하느님을 모르는 체하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주님의 분노가 닥칠 것이니, 그날 화를 피하려면 주님의 이름에 피신하라고 합니다. 정작 주님을 찾고, 주님께 피신해야 하는 이들은 예언자의 외침을 못 들은 척하고, 파멸 뒤에 예루살렘에 남아 고통을 겪게 될 사람들은 하느님의 법규를 실천하는 가난하고 겸손한 이들뿐입니다. 잘 살고, 잘 났다는 이들이 오만에 젖어 하느님의 정의를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에 파멸의 땅에 남아 고생하게 될 사람들이 진정한 하느님의 백성이 되리라고 선언합니다. 겸손한 이에게는 지혜가 따르고 오만한 이에게는 수치가 따르듯이(잠언 11,2) 오만하고 권력을 쥔 이들에게는 하느님의 분노가 내릴 것입니다. 남아 있는 의롭고 겸손한 이들은 지혜로워서 하느님을 피신처로 삼을 줄 알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목자가 되시어 풀밭에서 풀을 뜯으면서 쉬는 양처럼 남아 있는 이들을 보살펴주실 것이라고 합니다(시편 23).
복음(마태 5,1-12ㄴ)은 산상설교로서 하늘나라를 차지할 조건을 말합니다.
마태오복음의 설교들(5-7; 10; 12; 18; 24-25장) 가운데 방금 들으신 산상설교가 가장 깁니다. 참행복은 예수님께서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을 완성하러 오셨으니(5,17; 7,12),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6,19)는 가르침으로 요약됩니다. 또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공동체가 하늘나라를 차지하도록(4,17.23; 5,3.10; 7,21) 유다인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라는(5,16) 격려입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의 의로움을 능가해야(5,20) 하는데, 그때 모욕당하고, 박해받을 것을 각오하라고 하십니다.
여덟 가지 행복 선언은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담긴 복음의 핵심 내용으로서 여섯째와 여덟째 행복의 주인공이 하늘나라를 차지할 것입니다. 첫째 행복의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하늘나라를 하느님의 선물로 알고 기다리는 사람들, 하느님의 이름에 피신한 남은 사람들입니다. 마음이 가난하고 겸손한 이들은 평화를 위해 애를 쓸 것(일곱째)이므로 그들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둘째 행복의 “슬퍼하는 이들”은 멸망한 예루살렘을 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하실 메시아(이사 61,2-3)를 기다리던 이들처럼 온갖 시련 속에서도 하느님의 약속에 희망을 두고 있는 이들에게 주시는 위로로 행복해질 것입니다. 셋째 행복의 “온유한 이들”은 “마음이 가난한 이들”(첫째)과 “평화를 이루는 이들”(일곱째)을 합친 것으로서 악인들의 횡포로 가진 것을 다 빼앗긴 이들이 받을 상속이란 하늘나라이므로 행복하다고 합니다(시편 37,11). 넷째 행복의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이들”은 하느님의 승리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누리는 행복을 말합니다(5,20). 처음 네 가지 행복은 거저 주어지는 행복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의 약속을 실현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살아가실 것이기 때문에 주어질 것이며,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도 실천적으로 동참해야만 주어질 하늘나라에 대한 희망을 제시합니다.
다섯째 행복은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호세 6,6)라고 두 번 반복하시는(9,13; 12,7) 예수님의 뜻을 잘 헤아려야 합니다. 율법보다 더 중요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를 무시하는 이들(23,23)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하고, 제자들이 다른 이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느님께서도 용서하실 것이기 때문에(6,14) 하느님 아버지처럼 “자비를 베푸는 이들”이 행복하다(18,33)는 것입니다. 여섯째 행복은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옳지 않은 것에 정신을 쏟지 않는 이”(시편 24,4)가 하늘나라를 차지할 것이라서 행복하다고 합니다. 마음이 깨끗하면 하느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게 되므로 하느님을 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곱째 행복은 완전한 평화의 나라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기(5,45)에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녀가 되려면 원수는 물론(5,44) 자기들을 모욕하고 박해하는 사람들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여덟째 행복은 율법학자와 바리사이의 의로움을 능가하려고 애쓰다가 겪을 아픔은 물론 예수님 때문에(5,11) 제자들과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겪을 박해(도미시아노 황제: 1베드 3,14.17; 4,14)가 클지라도 최후의 날(25장)에 하늘나라를 차지할 수 있으므로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고 정의를 실천하기 때문에 박해받는 이들을 격려하는 것입니다.
제2독서(1코린 1,26-31)는 그리스도는 하느님에게서 오는 행복을 주는 지혜라고 합니다.
바오로가 선포하는 복음을 받아들인 코린토 공동체에 지혜롭다거나 유력하거나 가문이 좋다고 하는 이들이 그렇게 많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몇몇 사람들이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다.”(1코린 25)는 사실을 잊은 채 허접한 지식과 인간적 재주와 매력을 가지고 몹시 잘난 체한 것 같습니다. 구원될 자격이 없음에도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음을 까맣게 잊어버린 이들은 오만에 젖어 복음이 아니라 자신의 매력을 자랑하기에 여념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교육 방법은 약한 것을 통하여 굳셈을, 어리석은 것을 통하여 지혜를 드러내시는 것이며, 약한 것을 통하여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면서 교만한 자들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비천하고 천대받는 이들을 선택하셨음을 잊었던 것입니다. 오만한 이들보다는 겸손한 이들을 선택하시어 의롭게 해주시는 하느님 외에 아무런 자랑거리도 가지고 있지 않음을 바오로는 상기시킵니다. 지혜이든 자신의 재주와 인간적 매력이든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므로 주님의 업적을 자랑하라고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야말로 우리를 위하여 기쁜 소식과 참행복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지혜라고 선포했는데, 코린토인들은 바오로가 어리석은 짓을 한다고 반박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탁월한 지혜이므로 그분을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을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처럼 이웃을 사랑하고(로마 13,8-10) 하늘나라에 들기 위해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않고 의롭고 겸손하게 사는 것이 참행복의 조건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범적으로 사셨던 참행복의 원칙은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는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지녀야 할 덕목으로서 겸손과 신앙을 간직하고, 세속적 유혹과 죄악을 끊어버릴 때 가능합니다. 그래서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계명)을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입니다.”(마태 5,19) 물론 여덟 가지 행복의 조건대로 산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을 되새기면서 의롭게 살려고 애쓰고, 주님을 피신처로 삼아 겸손하게 살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랑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행복을 주실 것입니다.
행복이란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무엇을 지칭하기 위해 편의상 붙인 단어로서 매우 주관적인 경험이기에 비교나 측정 불가능하고 남에게 설명하기 어려우며, 진위를 평가하기 매우 힘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객관적인 경험으로 비교할 수 있고, 측정할 수 있으며, 남에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진위를 평가할 수 있는 잣대를 주시면서 행복의 조건을 말씀하십니다. 참행복은 매우 역설적이라서 겸손과 의로움을 실천할 때 맛볼 수 있는 기쁨입니다. 겸손과 의로움을 찾는 이들이 겪어야 할 아픔이 클지라도 하느님께서는 그에 따르는 상급을 주시려고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의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고백하는 베드로에게 “너는 행복하다!”(마태 16,17)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은 행복하기에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어주고 하늘나라로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행복하지 않다면 오늘 복음에 나오는 행복의 조건이 무엇인지 잘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다면 우리가 신앙 안에서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나의 행복이, 나의 자랑거리가 이웃에게 사랑과 평화로 남아야 함께 행복합니다. 나의 어리석음과 교만이 이웃에게 아픔으로 남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시다.
- 방효익 바오로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