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2026년 3월 24일 (자) 사순 제5주간 화요일 <사랑의 내어줌으로 들어 올려지는 삶>기경호프란치스코 ofm
작성자stellakang작성시간26.03.24조회수92 목록 댓글 42026년 3월 24일 (자) 사순 제5주간 화요일
민수 21,4-9; 요한 8,21-30
제1독서
<물린 자는 누구든지 구리 뱀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 민수기의 말씀입니다.21,4-9
그 무렵 이스라엘은 4 에돔 땅을 돌아서 가려고,
호르 산을 떠나 갈대 바다로 가는 길에 들어섰다.
길을 가는 동안에 백성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5 그래서 백성은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하였다.
“당신들은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시오? 양식도 없고 물도 없소.
이 보잘것없는 양식은 이제 진저리가 나오.”
6 그러자 주님께서 백성에게 불 뱀들을 보내셨다.
그것들이 백성을 물어,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죽었다.
7 백성이 모세에게 와서 간청하였다.
“우리가 주님과 당신께 불평하여 죄를 지었습니다.
이 뱀을 우리에게서 치워 주시도록 주님께 기도해 주십시오.”
그래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8 그러자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9 그리하여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 놓았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8,21-30
그때에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21 이르셨다.
“나는 간다. 너희가 나를 찾겠지만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22 그러자 유다인들이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하니,
자살하겠다는 말인가?” 하였다.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24 그래서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25 그러자 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누구요?”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처음부터 내가 너희에게 말해 오지 않았느냐?
26 나는 너희에 관하여 이야기할 것도, 심판할 것도 많다.
그러나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참되시기에,
나는 그분에게서 들은 것을 이 세상에 이야기할 따름이다.”
27 그들은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다.
28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29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30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많은 사람이 그분을 믿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사랑의 내어줌으로 들어 올려지는 삶
제1독서는 광야를 지나던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과 모세를 거슬러 원망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시오?”(민수 21,5)라는 백성의 탄식은 불평과 반항의 표현입니다. 그 결과로 나타난 “불 뱀들”은 육체적 고통뿐 아니라 죄가 내면을 태우는 불길을 상징합니다. 모세가 하느님의 명령으로 구리 뱀을 들어 올렸을 때, 그것을 바라보는 이는 치유를 받았습니다. 이는 미신적 행위가 아니라 절망 속에서도 시선을 들어 믿음으로 응답하는 구체적 행위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요한 8,28)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들려 올려지시어” “영광스럽게 되십니다.” 십자가는 단순한 형벌이 아니라 계시입니다. 예수께서 “나는 ~이다”가 아니라 “나는 나다”라고 하신 것은 그분 안에 존재의 충만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거부하는 이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8,24)이며, 하느님과의 친교 단절 안에 머무르게 됩니다.
이 광야의 장면은 오늘 우리의 현실 속에서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최근 통계는 젊은 세대 안에서 우울과 불안이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 주며, 지속되는 전쟁은 수많은 난민을 낳고 있습니다. 디지털 공간에서는 공격적 언어가 관계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교회에도 피로와 불신이 존재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쉽게 원망과 비난에 머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구체적 행동을 요청합니다. 십자가에 들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이는 현실 도피가 아니라, 악이 최종 승자가 아님을 믿는 신앙적 결단이며 사회적 책임의 시작입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이 진리를 삶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그는 산 다미아노의 십자가 앞에서 “내 집을 고쳐라”는 부르심을 듣고, 시대를 비난하기보다 회개와 형제애의 삶으로 응답했습니다. 나병환자를 껴안으며 두려움의 독을 사랑으로 바꾸었습니다. 이는 인간 존엄성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이라는 가톨릭 사회교리의 핵심을 구체적으로 실천한 사례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시선은 곧 상처 입은 형제를 향해 몸을 굽히는 행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8,29)고 선언하십니다. 이 확신은 오늘 우리 사명에도 힘이 됩니다. 십자가에 들리신 주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단순한 내적 감정이 아니라, 원망의 언어를 버리고 죄를 인정하며, 참된 들어 높임이 사랑의 자기 내어줌에 있음을 받아들이는 결단입니다. 불 뱀 같은 상처가 가득한 세상 속에서 교회는 치유의 시선을 지닌 공동체로 부름받았습니다. 그리스도, 곧 “나는 나다”이신 주님 안에서만 참된 희망이 드러남을 삶으로 증언해야 할 것입니다.
▶기경호프란치스코 of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