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기경호 신부 강론

2026년 6월 16일 (녹) 연중 제11주간 화요일<불가능해 보일 때 사랑하기>기경호프란치스코 ofm.

작성자stellakang|작성시간26.06.16|조회수112 목록 댓글 2

2026년 6월 16일연중 제11주간 화요일

1열왕 21,17-29; 마태 5,43-48

 

제1독서

<너는 이스라엘을 죄짓게 하였다.>
▥ 열왕기 상권의 말씀입니다.21,17-29
18 “일어나 사마리아에 있는 이스라엘 임금 아합을 만나러 내려가거라.
그는 지금 나봇의 포도밭을 차지하려고 그곳에 내려가 있다.
19 그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주님이 말한다. 살인을 하고 땅마저 차지하려느냐?’
그에게 또 이렇게 전하여라. ‘주님이 말한다.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던 바로 그 자리에서 개들이 네 피도 핥을 것이다.’”
20 아합 임금이 엘리야에게 말하였다. “이 내 원수! 또 나를 찾아왔소?”
엘리야가 대답하였다. “또 찾아왔습니다.
임금님이 자신을 팔면서까지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21 ‘나 이제 너에게 재앙을 내리겠다. 나는 네 후손들을 쓸어버리고,
아합에게 딸린 사내는 자유인이든 종이든 이스라엘에서 잘라 버리겠다.
22 나는 너의 집안을 느밧의 아들 예로보암의 집안처럼,
그리고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집안처럼 만들겠다.
너는 나의 분노를 돋우고 이스라엘을 죄짓게 하였다.’
23 주님께서는 이제벨을 두고도,
‘개들이 이즈르엘 들판에서 이제벨을 뜯어 먹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24 ‘아합에게 딸린 사람으로서 성안에서 죽은 자는 개들이 먹어 치우고,
들에서 죽은 자는 하늘의 새가 쪼아 먹을 것이다.’”
25 아합처럼 아내 이제벨의 충동질에 넘어가 자신을 팔면서까지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지른 자는 일찍이 없었다.
26 아합은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쫓아내신 아모리인들이 한 그대로
우상들을 따르며 참으로 역겨운 짓을 저질렀다.
27 아합은 이 말을 듣자,
제 옷을 찢고 맨몸에 자루옷을 걸치고 단식에 들어갔다.
그는 자루옷을 입은 채 자리에 누웠고, 풀이 죽은 채 돌아다녔다.
28 그때에 티스베 사람 엘리야에게 주님의 말씀이 내렸다.
29 “너는 아합이 내 앞에서 자신을 낮춘 것을 보았느냐?
그가 내 앞에서 자신을 낮추었으니,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내가 재앙을 내리지 않겠다.
그러나 그의 아들 대에 가서 그 집안에 재앙을 내리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5,43-4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3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4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45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46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47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씨앗 Semina Verbi: 연중 11주 화요일

불가능해 보일 때 사랑하기

 

제1독서에서 아합 임금은 나봇의 포도밭을 부당하게 빼앗은 뒤,

엘리야 예언자의 준엄한 말씀을 듣습니다. “네가 살인을 하고 땅마저 차지하려느냐?”(1열왕 21,19) 아합의 죄는 개인적 잘못만이 아니라 권력을 남용하여 가난한 이를 희생시키고 약한 이를 제거 대상으로 삼은 죄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이러한 논리를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경제적 성공을 위해 착취를 정당화할 때, 거짓말로 타인의 존엄을 무너뜨릴 때, 정치적·사회적 권력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용할 때가 그렇습니다.

 

우리는 직접 피를 흘리게 하지는 않더라도 말과 무관심, 배제와 멸시로 다른 이를 상처 입힙니다. 죄는 다른 이를 형제가 아니라 장애물로 보기 시작할 때 이미 시작됩니다.

 

이 이야기는 심판으로 끝나지 않고 회개로 이어집니다.

아합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옷을 찢고 맨몸에 자루옷을 걸치고 단식에 들어갔습니다.”(21,27) 참된 겸손은 자신을 변명하지 않고 자기 삶의 진실을 받아들일 때 시작됩니다.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낮춘다는 것은(כָּנַע) 자신이 삶의 절대적 주인이 아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많은 이가 자기 이미지를 지키려고 끊임없이 정당화하고 타인에게 책임을 돌리는 시대에, 아합의 태도는 오히려 놀랍게 다가옵니다. 회개는 자기 자존심을 지키려는 태도를 내려놓고, 말씀이 나를 판단하시도록 허락할 때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부르심을 더욱 깊은 차원으로 이끄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상대가 자격이 없어 보일 때에도 그의 선익을 선택하는 구체적 결단이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불의를 묵인하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증오의 악순환을 끊으라고 요청하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념 갈등, 인터넷과 SNS 안의 공격성, 정치적 양극화, 가정과 공동체 안의 깊은 상처 속에서 살아갑니다. 많은 사람이 반대편 사람을 미워하고 조롱하는 일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증오로는 결코 하느님 나라를 세울 수 없다고 가르치십니다.

 

원수조차도 하늘 아버지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5,48)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완전함은 실수를 하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로 사랑하는 데 있습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바로 이 복음을 철저히 살아냈습니다.

도시 국가 간의 전쟁과 사회적 갈등이 가득했던 시대에 그는 보편적 형제애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던 나병 환자에게 다가가 그를 껴안았습니다. 그 순간 그는 복음이 힘이 아니라 자비로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또한 십자군 전쟁 중에는 술탄을 찾아가 그를 굴복시키려 하지 않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인간으로 만나고자 했습니다. 그는 진정한 원수는 교만과 폭력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태양과 불, 심지어 죽음까지도 형제자매라고 불렀습니다. 하느님과 화해한 사람은 결국 모든 피조물과도 화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 삶을 매우 구체적으로 성찰하게 합니다.

나는 누구를 배제하고 있습니까? 나는 어떤 원한을 아직도 붙들고 살아갑니까? 내 지위와 말과 침묵으로 누군가를 억누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거창한 일이 아니라,

먼저 판단하기보다 귀 기울이고, 타인을 모욕하는 일을 멈추며, 진심으로 용서를 청하고, 나에게 상처 준 이를 위해 기도하며,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이의 존엄을 지켜주는 작은 실천에서 시작됩니다.

 

그리스도인은 복수와 멸시의 논리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오직 겸손한 마음만이 이러한 사랑을 살아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비로 변화된 사람만이 상처 입은 이 세상 한가운데에서 그리스도의 평화를 드러내는 살아 있는 표지가 될 수 있습니다.

 

기경호프란치스코 ofm.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발아래 | 작성시간 26.06.17 아멘. 감사합니다.
  • 작성자김현웅미카엘 | 작성시간 26.06.18 new 아멘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