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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공 정척 선생 가문을 소개한다[문암 역사작가의 보금자리-2024-06-17]

작성자문암|작성시간24.06.17|조회수43 목록 댓글 0

필자가 감찰공 박여해 선조의 행적을 조사한지 어느 새

한달이 지나고 서서히 두달을 향하여 매일 전진하고 있다.

감찰공과 관련된 직접적인 기록을 발견한 것은 없으나

그런 가운데서도 감찰공을 중심으로 여러 친척 가문들의

역사를 알게 된 점에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자부한다.

본가의 사촌동생을 비롯해 처가와 외가,고모부 가문에서

조선에 출사하지 않고 고려에 끝까지 절의를 지킨 분들께

경의를 표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감찰공의 조카사위 가문까지 조사하기에

이르렀으니 그야말로 예측을 불허하는 순간이라 할 수 있다.

감찰공의 조카사위는 정암공 정척 선생인데 고려가 멸망하기

2년전에 탄생해 조선이 건국된 이후 6대의 왕을 모셨으니

참으로 대단한 경력이라 아니할 수 없다.

1475년 성종 재위 6년에 향년 86세에 별세하시니 당시로선

대단한 수를 누렸다고 본다.

벼슬로는 그 권위가 영의정에 버금가는 대제학에 이르렀으며,

특히 성품이 강직하면서도 청렴하여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해서에 일가견이 있었으며, 지도제작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여

주었다.

정암공은 5남 2녀를 두었는데, 특히 두번째 부인 광주이씨

사이에 탄생한 충절공 정성근 선생을 주목한다.

필자가 이미 충절공을 추모한 칼럼을 올린 바 있는데, 다른 분들이

고려에 절의를 지켰다면 충절공은 조선의 왕에게 충절을 지켰다고

생각한다.

생각해보면 충절공은 감찰공의 행적을 조사하지 않았다면 지금

이 순간까지도 조선에 이런 인물이 있는 것을 몰랐을 것이라 생각하니

이렇게 감찰공으로 인해 뒤늦게나마 충절공을 알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르겠다.

충절공은 감찰공의 생질녀인 광주이씨의 유일한 아들이라 할 수

있으며, 정암공이 57세에 탄생하였으니 집안으로 볼 때 참으로

귀한 아들로 볼 수 있다.

1446년생이니 세종 재위 28년이 되는 해에 탄생하였다.

세종이 1450년에 승하했으니 이는 세종이 승하하기 4년전이었다.

진사와 생원시 양시를 합격하고 더 나아가서 대과까지 합격하면서

보통 실력이 아니라는 것을 유감없이 보여 주었으며, 해주목사를

비롯해 특히 왕의 비서라 할 수 있는 승지를 역임한 것으로 볼 때

성종의 신임도 두터웠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이러한 충절공의 인생에 하나의 변수가 발생하였으니 그것은

성종의 승하였다.

성종이 1494년에 승하했는데, 평소 왕의 신임을 받았던 충절공의

입장에선 신하로서 그 충격이 대단하였을 것이다.

특히 평소 부모에 대한 효심이 대단하였던 충절공의 입장에선 부모의

3년상을 모시듯이 성종에 대한 신하의 도리로서 3년상을 모시는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성종에 이어서 왕으로 즉위한 연산군은 그러한 충절공의

모습이 그리 긍정적으로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조선은 국시가 유교사상이 중심을 이룬 국가라 할 수 있는데, 특히

부모가 별세하신 이후 3년상을 모시는 것을 자손으로서 중요한 도리로

여기는 그런 국가였다.

그런데 연산군은 역대 왕과는 달리 이 정책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이번에 연산군 때 단년상이 실시된 것을 처음 알았는데 생각보다

단년상을 소개한 기록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단년상은 3년상에 비해 그 시묘기간을 대폭

줄인다는 의미로 이해하였다.

그렇다면 연산군은 왜 단년상을 고수하였을까?

이 문제에 대한 필자의 견해를 밝힌다.

연산군의 생모는 왕비로 있다가 문제가 발생하여 성종에 의해 폐위되어

결국 사약으로 생을 마감한 불행한 왕비였다.

연산군의 입장에서 자신의 생모가 그런 불행한 죽음을 맞이한 전모를

알게 된 순간 분노에 치를 떨어 당시 그 사건에 연루된 신하들에게 일대

숙청을 가하니 이것이 조선의 4대사화중의 하나인 갑자사화였다.

사실 필자는 충절공이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참수되었다고 해서 그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성이 있어서 별세하신 것으로 생각했다.

이와 관련해 충절공이 처형당하신 해가 1504년 4월 15일이니 갑자사화가

일어난 시기에 별세하신 것은 팩트이나 엄밀히 말해 본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본 사건보다는 바로 3년상과 관련이 있다고 보는 것인데, 연산군으로선

부왕이 생모를 폐위시켜 결국 사약으로 세상을 떠나게 하셨으니 그런

부왕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느꼈을 것으로 본다.

이러한 상황에서 충절공이 자신이 지시한 단년상을 실행하지 않고 기어코

3년상을 고수하니 그런 신하가 좋게 보일리 없었을 것으로 본다.

그렇다고 해서 3년상을 마친 이후 바로 조치를 취한 것은 아니지만

갑자사화가 일어난 해를 하나의 기회로 삼아 충절공을 대역죄인으로

몰아서 조지서, 김취인 선생과 함께 참수형을 내리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이러한 부친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충절공의 차남 박사공 정주신 선생이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감옥에 갇혔다고 하며, 6일동안 식음을 전폐하다가

결국 부친을 따라서 세상을 떠났으니 한마디로 부친은 충절의 도리를

다하였고 아들은 효성의 도리를 다하였으니 후세에 귀감이 되지 않을 수

없다.

2024년 6월 17일(월) 문 암 올 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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