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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년동안 베일에 싸여 있는 박여해 선조의 자(字)를 투철한 사명감을 가지고 찾을 것이다/문암 역사작가의 보금자리-2024-09-12

작성자문암|작성시간24.09.12|조회수28 목록 댓글 0

박여해 선조 연구 4개월을 맞이 하면서 기존의 판과 다른 판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동안 박여해 선조가 김윤남 선생의 사위가 되신 내력을 밝히고 싶었으나 일단

그 문제는 더 이상 진행하지 않기로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여해 선조의 휘()와 이순신 장군의 자()가 한자까지

일치하는 사실에 다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사실 이 부분은 초기 연구 때 뱔견하였으나 당시에 관심 분야가 김윤남 선생과의

관련성에 포커스를 맞추다 보니 이 분야에 대한 연구가 더 이상 진전되지 않았다.

그런데 4개월이 지난 시점에 박여해 선조와 충무공과 관련된 문제를 조사하다가

충무공의 자(字)를 다름아닌 모친이신 초계변씨께서 직접 지어주신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덧붙이면 당시 초계변씨의 학문적인 수준이 어느정도 였는지 가늠하기 어려우나

서경(書經)에 나와 있는 순황제 관련 글을 인용하여 충무공의 자(字)를 완성하셨다는

것이니 과연 충무공의 모친께서 보통분이 아니라는 것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조선중기에 여성들의 인권이 거의 인정되지 않는 그런 시대에 일반적으로

관례(冠禮) 시에 가문의 대표인 문장(門長)이 부여하는 자()를 초계변씨가 직접

지었다는 사실에 생각할수록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이러한 충무공의 자()를 생각하면서 어느 순간부터 감찰공 선조의 자()를

생각하게 되었다.

당시 감찰공의 사촌형은 태종의 최측근이었던 평도공 선조 였는데, 자()가 앙지

(仰止)였다는 사실인데 그에 반하여 감찰공의 자(字)는 족보에 누락되어 있으며, 현재

자()의 존재가 베일에 싸여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당시 가문의 위상으로 볼 때 감찰공도 관례를 거행하면서 문장으로부터 자()를

부여받으셨을 것으로 강력한 심증을 가지고 있으나 이를 입증할 수 있는 기록이 없다는

점에 통탄스러운 심정 금할 수 없다.

세월은 끊임없이 흘러 어느 덧 감찰공이 별세하신지 600년이 넘었는데 명예회복

차원에서 감찰공의 자(字)를 찾아 드리는 것을 목표로 앞으로 투철한 사명감을 가지고

연구에 매진할 것이다.

2024년 9월 12일(목) 문 암 올 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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