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가르침
성서를 통틀어 가장 짧게, 가장 많은 것을 가장 맛있게 얘기하는 대목 가운데 하나가 요한 1,37-41입니다.
안드레아와 요한이 예수님을 만나는 첫번째 상봉의 장면입니다.
이 두 청년이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가신다"는
세례자 요한의 말을 듣고 조용히 예수님의 뒤를 따라 나섭니다.
인기척을 느낀 예수님이 뒤를 돌아 물으십니다.
"너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요한 1,38).
두 청년이 물음으로 답합니다.
"랍비, 묵고 계시는 데가 어딘지 알고 싶습니다"
(요한 1,38).
예수님이 화답합니다.
"와서 보라"(요한 1,39).
두 청년은 예수님을 따라가 딱 한나절 오후 4시까지 함께 머뭅니다.
그리고 안드레아의 형 시몬 베드로에게 가서 말해 줍니다.
"우리가 찾던 메시아를 만났소"(요한 1,41).
이게 전부입니다. 붙이지도 않았고 빼지도 않았습니다.
이 짧은 이야기 속에 두 청년이 웬 낯선 분을 만나서
그가 '메시아'임을 알아봤다는 엄청난 얘기가 담겨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한평생 걸려도 불가능한 일이 여기 이 몇 문장으로 표현되었듯이
'하루 한나절'에 전개된 사건으로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묻고 답하는 말이 불교의 선문답(禪問答)을 넘어서는 경지입니다.
먼저 예수님이 말문을 여십니다.
"너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이에 두 청년은 세례자 요한이 이러저러하게 말하더라고 하지 않습니다.
한 수 배우고 싶습니다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뭐하는 분이십니까라고 묻지도 않습니다.
"랍비, 묵고 계시는 데가 어딘지 알고 싶습니다." 참 여운이 있는 질문입니다.
제자 될 자격이 있는 질문입니다.
이 물음에 예수님은 "와서 보라"하십니다.
기막힌 화답입니다.
"내가 사는 곳은 알아서 뭐 하려구" 도대체 뭐가 궁금한 건데?" 이런 식으로 되묻지 않으셨습니다.
이미 저 두 청년의 물음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셨기 때문입니다.
"와서 보라! 너희가 찾고 있는 것이 내 안에 있는지! 내 마음에 들어와서 보라!
집에 가서 물 한 잔 줄 터이니 쉬엄쉬엄 들어와서 보라!"
그리고 두 청년은 예수님 안에서 '메시아'를 만납니다.
거의 무언(無言)에 가까운 이 만남, 그 안에 놀라운 가르침이 깃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사람들을 사로잡는 '힘'이 있었습니다.
말씀의 위력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 광야에서 40일간의 단식 중에 다가온 사탄의 유혹을 말씀 몇 마디로 물리치셨습니다.
-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마르 1,17)는
말씀 한마디로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으로 하여금 그물과 배를 버
리고 당신을 따르게 하셨습니다.
- 안식일에 회당에 나가 구원의 도래를 선포하실 때도 사람들을 압도하셨습니다.
- 악령 들린 사람으로부터 악령을 쫓아내실 때에도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해결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들을 움직이게 했고, 감히 거역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한번 접한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성경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자 군중은 그의 가르침을 듣고 놀랐다.
그 가르치시는 것이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가 있기 때문이었다"(마태 7,28-29).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권위(權威)가 있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지니지 못했던 무언가 다른 힘과 품위가 있었습니다.
그 권위는 어디에서 온 것이었을까요?
한마디로 그 권위는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권위였습니다.
곧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하느님의 말씀'과 다름이 없었기 때문에 지니는 권위였습니다.
이러한 권위가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 말씀에는 "골수를 쪼개는 힘(히브4,12)"이 있었고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권능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있는 가르침을 듣게 됩니다.
여러분 자신이 말씀의 권위에 사로잡히고 감동하고 탄복하고 설복당하여
마침내 변화를 체험할 수 있도록 마음을 여시기 바랍니다.
차동엽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