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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전주교구 > 전주 치명자 산 성지

작성자Lee MY|작성시간24.05.12|조회수97 목록 댓글 0

소재지 :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낙수정2길 103-88 (대성동 산 11-1)

유항검과 부인 신희 등 일가 7분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 중바위 치명자 성지


전주 중바위 치명자산 성지에는 호남의 첫 사도요 순교자였던 유항검 일가 합장 묘가 있다. 

호남의 첫 사도요 순교자였던 유항검(柳恒儉, 1756~1801, 아우구스티노)과 그의 부인 신희, 

두 아들 유문석(柳文碩, 일명 문철, 1784~1801, 요한), 유중성(柳重誠, 일명 完碩, ?~1802, 마태오), 

제수 이육희의 유해 그리고 동정 부부 순교자 유중철(柳重哲, 1779~1801, 요한), 이순이(李順伊, 일명 유희, 1782~1802, 루갈다) 등 일곱 순교자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이들은 원래 치명한 후 김제군 재남리(현 전주시 덕진구 남정동)에 가매장됐다가 1914년 사순절 때 전동 본당 초대 

보두네(Baudounet, 尹沙勿, 1859-1915,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가 전동 본당 회장들을 동행하여 재남리 바우백이에 

매장된 무덤을 파묘하고 그 유해를 발굴했고, 4월 19일에 치명자산에 이장하였다. 

 

1993년 11월 29일에 이 묘소를 개장, 유해 확인 작업을 벌인 결과, 이 가족 묘소에는 7개의 옹기에 각각 유해가 담겨져 있었으며, 백사발에 인적 사항이 적혀 있었고, 숯을 담은 채 옹기를 막아 놓아 보존 상태가 비교적 양호했다.

이분들은 1801년(순조 1년) 신유박해 때, 9월부터 4개월여에 걸쳐 전주 남문 밖(현 전동 성당), 전주 감옥, 숲정이에서 처형되어 멸족되었다. 살아남은 노복과 친지들이 은밀하게 시체를 거두었으나 고향인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 초남 땅에 묻히지 못하고 들 건너 재남리 바위백이에 가매장되었다가 그 후 1914년 4월 19일 전동 성당 보두네 신부와 신도들이 이 산정에 모셨다.


이 산은 예부터 승암산(중바위 산)이라 불렸는데 산정에 천주교 순교자들이 묻힌 이후로는 치명자산 혹은 루갈다 산으로 더 많이 불려지고 있다. 

선인들이 해발 300m의 산정에 님들을 모신 뜻은 세계 교회가 ‘진주 중의 진주’라고 찬탄하는 동정 부부 순교자의 순결한 신심과 고매한 덕행, 그리고 숭고한 순교 정신을 높이 기리고 그 님들이 전주를 수호해 주기를 기원함이었다.


지방 기념물 제68호로 지정된 순교자 묘 바로 밑에는 순교자들의 순교 정신을 기리기 위해 1994년 5월 9일 건립된 기념 성당이 있고, 

그 아래 왼편에는 가파른 산길을 걸으며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십자가의 길이 있다. 

오른편에는 전주교구 성직자 묘지가 조성되어 있다.

 순교 신앙을 가슴에 품고 있는 이 산은 진리의 뜻을 세운 사람과 순교자들을 흠모하는 순례자들에게는 믿음의 고향이며, 기도 공원으로 사랑받는 한국의 몽마르트르(순교자의 산)다.

◆ 몽마르뜨 성지란?
몽마르뜨르는 프랑스 파리 북동쪽에 있는 표고 130m의 작은 언덕으로 ‘순교의 언덕’(mons martyrum)이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파리의 초대 주교였던 성인 디오니시오가 이산에서 순교하여 「순교자의 산」이란 뜻으로 「몽 데 마르뜨르」 라고 불려 오다가 후에 「몽마르뜨르」로 불리게 된 것이다.


이곳에는 1870년 독일과의 교전으로 시련을 격게 된 프랑스 국민들이 거국적으로 성금을 모아 1910년에 건립한 거대한 백악(白堊)의 

아름다운 예수성심 대성당이 정상에 세워져 파리의 명소가 되었지만, 실은 유서 깊은 천주교 순교 성지요 파리를 지켜주는 축복의 언덕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치명자 산」또한 「전주의 몽마르뜨」라 부르는 것이다.


▒ 성 디오니시오(Dionysius) 주교
원래 성 디오니시우스(또는 디오니시오)는 이탈리아 태생 주교였으나 250년에 선교사로서 프랑스 지방으로 파견되었다. 

이때 6명의 주교들이 프랑스로 갔다고 한다. 그는 파리의 초대 주교로서 활약하였다. 

그는 불과 몇 년을 선교하다가 자신의 사제인 성 루스티쿠스(Rusticus)와 부제 성 엘레우테리우스(Eleutherius)와 함께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이 세 성인은 데키우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파리 근교에서 참수되었는데, 참수된 곳을 사람들이 몽마르트르 

곧 '순교자의 언덕'으로 불렀다. 이곳이 오늘날의 몽마르트르 거리이다. 

그들의 유해는 센(Seine) 강에 던져졌으나 곧 찾아냈으며, 그들의 무덤 위에 성당을 지었는데 이곳이 그 유명한 생 드니의 베네딕토 수도원이 되었다.

 성 디오니시우스는 데니스(Denis) 또는 드니로도 불린다. 축일은 10월 9일이며, 활동연도는 258년(?)경이다.

     ▒  뜨거이 죄를 지어 (중바위 치명자산에서)  <김영수> ▒

          가파른 돌산 기린봉 능선으로
          나는 십자가의 길 오를니다
          나의 생애는 여전히 죽지 않아
          어둠 속에서 아득하지만
          날개 투명한 구름들은
          안전한 귀환(歸還)으로 날아듭니다
          순결한 영혼들이 뜨거운 고독으로
          일구었던 소망을
          내 이제 14처의 끝에서 바라봅니다
          하늘 사랑하는 죄가
          가장 황홀한 죄입니까
          나는 언제 뜨거이 죄를 지어
          중바위 발치에라도 머물까요
          가장 멀리에서 들려오는 음향이
          가장 맑은 눈물 안고 돌아옵니다

■ 순교자

◆ 복자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1756∼1801년) 
1754년 전주 초남(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유항검 아우구스티노는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전라도 지역 최초의 신자가 된 것이다. 1801년에 순교한 유중철(요한)과 유문석(요한)은 그의 아들이고, 

그 다음 해에 순교한 이순이(루갈다)는 그의 며느리, 유중성(마태오)은 그의 조카이다.  


그에게 교리를 가르쳐 준 사람은 경기도 양근의 인척 권일신이었다. 이내 이승훈(베드로)에게서 세례를 받은 뒤 

고향으로 내려와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가족과 친척은 물론 그의 집에 있던 종들도 모두 그의 전교 대상이 되었다.


1786년 봄에 가성직제도하에서 그도 전라도 지역의 신부로 임명되었음이 거의 확실하다. 

이후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거나 그들을 모아놓고 미사를 집전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에 지도층 신자들은 이러한 행위가 독성죄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따라서 그는 자신의 성무 활동을 중단하였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다.  

박해가 일어나자마자 그는 전라도 교회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가장 일찍 체포되었다. 

그는 전주에서 포도청과 형조, 의금부를 차례로 거치면서 문초와 형벌을 받고 그에게 모반죄를 적용하여 처형하도록 하였고, 

이러한 판결에 따라 그는 전주로 옮겨져 10월 24일(음력 9월 17일) 남문 밖에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46세였다.

◆ 복자 유문석 요한 (1784∼1801년)  
유문석 요한은 전라도 전주의 초남이(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에 거주하던 부유한 양반 집안에서 1784년에 태어났다.

 1801년의 신유박해 순교자인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은 그의 부친이고, 유중철(요한)은 그의 형이며, 이순이(누갈다)는 

그의 형수가 된다.

 1795년 주문모 신부가 초남이 마을을 방문하였을 때 요한의 나이는 12살이었다.


1801년 박해 때 초남이에서는 그의 부친 유항검이 가장 먼저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고, 이어 유중철과 친척들이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혔다. 

이때 요한은 다행히 체포되지 않았으므로 여름 내내 전주 옥을 오가며 형에게 음식을 전해 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해 9월 중순 그도 남은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히고 11월 14일(음력 10월 9일)에 옥에서 끌려나와 

형 유중철과 함께 교수형을 받았다. 당시 그의 나이는 18살이었다.

◆ 복자 유중성 마태오 ( ? ∼1802년)  
유중성 마태오는 전라도 전주의 부유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집안의 장남이던 부친이 36살의 나이로 사망하였고, 이후 그는 전주 초남이(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에 있는 

작은 아버지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의 집에서 자라게 되었다.

 1801년의 신유박해 순교자 유중철(요한)과 유문석(요한)은 그의 사촌 형제들이다.


1801년 박해가 일어나자 그의 집안에서는 유항검과 유중철이 먼저 체포되었고, 그는 9월 중순 무렵에 어머니를 비롯하여 

다른 친척들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혔다. 

그는 유배형을 받고 함경도 회령 유배지로 가며 사람들 앞에서 “관장이 국법에 따라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하지 않고 유배를 보냈다.”고 외쳤다. 

 

그러자 감사 앞으로 끌려 나가 문초와 형벌을 받고, 1802년 1월 31일(음력 1801년 12월 28일) 친척들과 함께 숲정이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 그의 나이는 약 18세였다.

◆ 복자 유중철 요한 (1779∼1801년)  
유중철 요한은 1779년 전주 초남(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의 부유한 양반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1801년에 순교한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은 그의 부친이고, 이순이(루갈다)는 그의 아내이며, 유문석(요한)은 그의 동생이다. 

그의 집은 전라도 신앙 공동체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러한 환경으로 인해 요한은 일찍 세례를 받고 신앙 안에서 자라나게 되었다. 

 

또 그는 한정흠(스타니슬라오)으로부터 오랫동안 글을 배워 어느 정도 학식도 갖추게 되었다.
그는 17세가 되던 1795년 주문모 신부가 초남 마을을 방문하였을 때 첫 영성체를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때

 ‘동정 생활을 하겠다’는 자신의 결심을 주 신부와 부친 앞에서 털어놓았다.

 다음해 9월 요한은 아내 루갈다와 함께 부모님 앞에서 동정 서약을 하고 오누이처럼 일생을 살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러다가 1801년 봄 신유박해로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히게 되었다. 9월 중순에는 요한의 아내 루갈다를 비롯하여 

동생과 다른 가족들도 체포되었다. 

그리고 20여 일 후 포졸들은 유문석을 가족들에게서 떼어내 형인 유중철 요한에게로 데려왔다. 

그런 다음 관장의 명에 따라 그 둘을 교수형에 처하였으니, 그때가 1801년 11월 14일(음력 10월 9일)로, 당시 요한의 나이는 23세였다.

◆ 복자 이순이 루갈다 (1782∼1802년)  
이순이 루갈다는 1782년 한양의 유명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하였다.

 1801년에 순교한 이경도(가롤로)와 1827년에 순교한 이경언(바오로)은 그녀와 남매간이고, 

1801년에 순교한 유중철(요한)은 그녀의 남편이다. 1793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열심히 교리를 실천해 나갔다. 

주 신부의 주선으로 전주 유중철과 동정 서약을 하고 오누이처럼 일생을 살겠다고 다짐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발생한 지 얼마 안 되어 루갈다의 시아버지 유항검이 가장 먼저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고, 

이어 그녀의 남편 유중철도 체포되어 전주로 끌려갔다. 

루갈다는 그해 9월 중순경에 나머지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 결과 루갈다는 유배형을 받고 함경도로 떠나게 되었다. 루갈다가 친척들과 함께 유배지로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전주에서 파견된 포졸들이 쫓아와 그들을 다시 체포하였다.


다시 감사 앞으로 끌려 나간 루갈다는 사형 선고를 받은 다음 매를 맞고 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런데도 루갈다는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않았으며, 4∼5일 뒤에는 형벌로 인한 상처가 말끔하게 나았다고 한다. 

감사는 결국 조정에 사형 판결을 요청하였고, 얼마 뒤에는 임금의 윤허가 내려오게 되었다. 

이에 따라 루갈다는 1802년 1월 31일(음력 1801년 12월 28일) 친척들과 함께 전주 숲정이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 그녀의 나이는 20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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