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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적인 글

영의 선물은 지혜입니다 2

작성자윈드해드|작성시간24.05.18|조회수178 목록 댓글 2

영의 선물은 지혜입니다 2

 

 

1.지혜의 선물

 

지혜는 하느님의 눈으로, 그분의 시선으로,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하늘에서 굽어보시듯 바라보게 해주는 선물입니다. 지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그리고 부활의 영광에서 바라보시는 대로 사건과 상황들을 바라보게 해주는 선물입니다. 위에서, 중심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특별한 통찰이나 지적인 빛 때문이 아니라 신적 본능, 타고난 천성 때문입니다.

 

이제 신적 본성으로 말미암는다는 말의 뜻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합시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 우리 중심에 자리하고 계신 예수님 안에, 모든 것 위에 계시는 하느님 안에 있기 위해서입니다. 타고난 지식은 '지혜'라 불리며, 우리는 그것을 결정과 입장표명과 선택이 하느님의 나라를 따른 것이냐 아니냐를 깨달을 때 체험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그것을 초자연적 본성으로도 깨닫습니다. 성령에 이끌린 그리스도인은 어떤 것이 하느님의 계획에 따른 것이냐 아니냐, 잘되고 있느냐 아니냐, 복음에 순응하는것이냐 아니냐를 알아차립니다.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머리보다 마음으로 느끼며, 따라서 이 선물은 통찰보다 사랑, 애덕(愛德)에 더 긴밀하게 결합됩니다. 이 선물은 사랑과 마음의 통찰입니다.

 

즉, 지혜란 하느님의 신비에 관한 사랑스럽고 맛깔스런 직관, 즉 삼위일체의 신비와 십자가의 신비, 하늘나라의 신비, 역사의 신비에 대한 사랑스럽고 맛깔스런 직관입니다.

 

이와 같은 지혜는 또한 다른 누구보다 가장 단순한 이들에게 주어집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11, 25)

 

이 선물은 확실히 삶의 가장 일상적인 측면과 맞닿아 있는 선물입니다. 지혜는 보아 폭넓은 장에서, 공동선의 장에서 각각의 문제를 제자리에 배치하게 해주는 선물이요, 공공의 책임을 가진 사람에게 절대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선물입니다. 종종 우리는 정치인들에 대해 한탄을 금치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위해서 얼마나 기도하고 있습니까? 그들에게 지혜의 선물을 내려달라고 애원한 적이 있습니까?

 

2.어리석음

 

성경은 지혜에 반하는 것을 여러 이름으로-무지, 어리석음, 우둔함-부르며, 지혜에 반하는  이러한 태도에 대해 자주 언급합니다. 본질적으로 그것은 하느님의 일에 대한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것, 하느님의 의미를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것, 신비의 의미를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것, 하느님 섭리의 의미를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제대로 느낄 줄 모르는 부족함은 우리를 소경으로 만들고 길을 잃게 만듭니다. 이는 수많은 고뇌와 두려움과 정신적 혼란의 원천입니다.

 

가장 지나친 어리석음의 경우는 신약성경에서 호된 질책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엠마오의 두 제자를 호되게 질책하십니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루카24,25).

 

이것은 명료하지 않은 사건들이나 예상과 달리 벌어진 사건들 안에서, 십자가를 배제하려는 마음을 전혀 갖고 있지 않으신 하느님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의 어리석음입니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마태7,25) 위의 사람의 삶은 우둔하고 무지한 삶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의 무지는 파멸을 몰고 오는 무지입니다.

 

한 개인의 무지도 그럴진대, 본당 공동체나 모임 및 운동등이 모래 위에 세워진 누각과 같다면 그것은 모든 것들에 커다란 해를 가할 수 있는 무지입니다. 마태오 복음18장에서 표현하는 대로, 복음적 삶의 질서를 인식하지 못하면 그 질서는 모래 위에 세워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공동체의 질서는 작은 이들을 자처하고, 첫째가는 자리를 탐하지 않고, 가장 약한 이들을 존중하고, 형제들을 돌보고, 권위를 존중해주고, 공동의 기도를 사랑하고, 해를 입힌 자들을 용서하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그리스도인의 지혜가 무엇인지, 십자가의 지혜가 무엇인지, 어리석음과 무지를 비교해가며  지혜의 선물이 무엇인지 이해하려 했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우리를 이 길로 이끌어주신 하느님께, 그 같은 선물을 우리 안에 충만히 채워주시기를 바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아무쪼록 우리가 그 선물로 가득 채워지기를 하느님께 간청하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저는 중요한 해명을 하나 달아둘까 합니다. 즉 영의 선물은 감지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기 내면을 생각하고 성찰하고 분석해야만 비로소 내 안에서 지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이 선물을 실감하지는 못합니다. 나중에서야 이 본능적 선물이 나에게 있음을 알아차리고 나서 그때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 주님께서 어려운 상황에서 잘 판단하도록 나를 도와주셨구나!" 아니면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은 정말 옳은 말을 하였구나!" 이처럼 우리는 나중에서야 그 같은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 선물을 가졌다고 떠들어대는 사람은 자칫 선물을 변질시키거나 망가뜨릴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반대로 단순한 마음으로 선물을 청하면서 신뢰로써 성령께 의탁하는 사람은 나중에 그 선물이 자기에게 있었음을  알아차릴 것입니다. 그 순간에 꼭 그것을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기 위하여 반드시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알리실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카를로 마리아 마르티니의 <영은 어디에서 불타오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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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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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박종해 스테파노 | 작성시간 24.05.18 아멘.
    하느님 감사합니다.
    댓글 첨부 이미지 이미지 확대
  • 작성자쟈디스[알폰소] | 작성시간 24.05.18 찬미 예수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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