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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대구대교구 >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

작성자Lee MY|작성시간24.12.03|조회수150 목록 댓글 0

 

소재지 : 대구광역시 중구 명륜로12길 47 (남산동 219) 현 대구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1914년 개교한 대구의 첫 신학교


1911년 조선교구(서울교구)에서 대구교구가 분리된 후 초대 교구장으로 취임한 드망즈 주교가 교구 사제 양성을 위해 

1914년 5월 27일 신학생 58명으로 개교한 대구의 첫 신학교다. 

초대 교장에는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 교수였던 샤르즈뵈프(Chargeboeuf, 宋德望, 1867~1920, 스테파노) 신부가 취임했고, 

교육 과정은 중등과 철학과 신학과 등 12년제의 학교였다.


드망즈(Demange, 安世華, 1875~1935, 플로리아노) 주교의 노력으로 개교한 신학교는 기부자의 요청대로 학교 이름을

 ‘성 유스티노 신학교’로 정하고, 첫 신입생으로 주재용(朱在用, 1894~1975, 바오로) 등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재학 중이던 

17명의 대구대목구 소속 신학생들을 포함하여 58명을 받아들였다.

 

신학교의 학제는 용산 신학교와 같이 라틴어 교육 중심의 보통 교육 과정(소신학과 6년)과 철학 및 신학 과정(대신학과 6년)이었으며, 

대신학과와 소신학과는 각각 2학급으로 구성되었고, 신입생은 3년마다 50명 내외를 선발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1918년 2월 23일에 주재용 신부가 성 유스티노 신학교 출신의 첫 번째 사제로 서품되었다.

사제 양성 교육 기관으로 꾸준히 성장하던 성 유스티노 신학교는 1940년대 들어 폐교의 아픔을 겪게 되었다. 

당시 한국 내의 신학교는 서울, 대구, 덕원 등에 3개가 있었는데, 이중 정식으로 인가된 것은 1935년 2월에 인가된 덕원 신학교뿐이었다. 

이에 용산 신학교는 총독부의 무허가 학교 폐교 조치에 따라 1942년 2월 16일 폐교되었고, 

성 유스티노 신학교는 폐교의 위협 속에 있다가 1944년 12월 23일의 서품식을 끝으로 이듬해 3월 19일 폐교되고 말았다.


성 유스티노 신학교 건물은 중국인 벽돌공을 동원하여 완공한 붉은 벽돌로 된 2층 신학교 건물로 서울 명동 성당의 건축에 참여했던 

프와넬(Poisnel, 朴道行, 1855~1925, 빅토리노) 신부가 건립 계획을 세웠고 공사는 중국인 기술자들이 

담당하였으며, 책임 목수는 프랑스 영사관을 건축할 때 참여한 사람들이었다 한다.


이 건물은 프랑스인 신부들이 서구의 근대 건축 양식과 함께 벽돌 제조 및 조적 기술을 대구 부민에게 

소개한 의미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구의 천주교사를 담고 있는 역사적 건물로 로마네스크와 고딕 풍에 준하는 비교적 순수한 

서구식 건물로 벽돌의 조적이 정교한 우수한 건물이다.
학교는 ㄷ자형 평면으로 중앙에 있는 성당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이며 1층 전면에는 로마네스크 건축에서 많이 사용되었던 

연속 아치로 툇간을 설치하여 복도로 사용하였다. 

현재 전면으로 돌출되었던 양 날개 부분은 철거되고 중심 부분만 남아 있다.

▒ 성 유스티노 신학교
1912년 드망즈 신부는 신학교를 세우기 위하여 서울 명동 성당의 건축에 참여하였던 프와넬 신부를 초청하여 건립 계획을 세웠다. 

세계 각 지역에 재정 지원을 호소하여 1913년 9월 중국 상하이에서 익명의 신자가 신학교의 주보로 성 유스티노를 모시는 조건으로 

거액의 헌금을 보내오고, 대구의 신자 서상돈이 부지를 기증하여 공사에 착수하였다. 

프랑스인 신부들이 서구의 근대 건축 양식과 함께 벽돌 제조 및 조적 기술을 대구민에게 소개한 의의를 가지며 대구의 천주교사를 담고 있는 

역사적 건물이다.

▒ 프와넬(朴道行, Poisnel, Victor Louis, 1855~1925) 부주교
프와넬 신부는 프랑스 노르망디(Normandie) 지방에서 태어났다.1881년 8월 3일 한국으로 떠났으나 곧장 한국으로 들어올 수가 없어 

일본 나가사끼(長崎)에 기착하였다. 

그는 때마침 한국에서 추방당한 리델(Ridel) 주교를 만나 그의 병 간호를 하다가 나중에 드게트(Deguette) 신부를 따라 한국에 잠입하였다.


첫 포교지도 황해도와 평안도를 맡게 되었으나, 얼마 안 되어 뮈텔 신부가 본국으로 돌아가자 그의 후임으로 조선교구의 경리 일을 맡아보게 되면서부터 

장차 교회 발전에 대비하기 위해, 기회를 포착하여 토지를 매입하는 일에 착수했는데 그의 이러한 선견지명과 끈질긴 추진력으로 

오늘의 명동 대성당을 지을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였다.


그는 종현(오늘의 명동) 주임 신부로 있을 때 종현(鐘峴) 대성당의 건축을 맡고 있던 코스트(Coste) 신부가 선종하자, 그 뒤를 이어 

오늘날 누구나 감탄하는 대성당을 완공시켰다. 

그 후 30년 동안 모든 성당과 기타 부속건물을 지을 때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 

1917년부터 부주교를 겸임하였고, 1925년 12월 26일 70세를 일기로 선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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