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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인/축일

G313)네스토리우스 가르침 단죄,교회 일치 도모한 그리스 교부의 한 명인 교회학자 聖 치릴로(6.27)大主敎 傳記 & 전구(轉求)기도

작성자베드로 문|작성시간24.06.27|조회수21 목록 댓글 1

 

오늘(6월27일)의 聖人 中 치릴로 大主敎 傳記 

 

기본정보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치릴로 (Cyril)
6월 27일
성인
총대주교교회학자교부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380?-444년
시릴, 시릴로, 시릴루스, 치릴루스, 키릴로, 키릴로스, 키릴루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태생인 성 키릴루스(Cyrillus, 또는 치릴로)는 그 도시의 총대주교인 테오필루스(Theophilus)의 조카였다.

어려서부터 성직자가 되기로 한 그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고전과 신학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고, 삼촌인 테오필루스에 의해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403년 총대주교인 삼촌을 수행해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로 가서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Johannes Chrisostomus, 9월 13일)를 단죄한 퀘르키아(Quercia) 주교 회의에 참석했으며, 417년까지는 테오필루스의 노선에 따라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를 반대하였다.

412년 10월 15일 테오필루스 총대주교가 사망하자 성 키릴루스는 사흘 후에 삼촌을 계승해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가 되었다. 그는 삼촌보다 더 뛰어난 신학적 역량을 갖춘 인물이었다.

   그러나 성 키릴루스의 지지자와 그의 경쟁자였던 티모테우스(Timotheus)의 지지자 사이에 격렬한 싸움이 일어나 그는 큰 상처를 입고 출발하였다. 그런데 성 키릴루스는 자신이 축출하였던 노바티아누스(Novatianus) 이단을 상대로 일련의 공격을 재개했고, 그리스도인들을 공격하던 유다인들을 추방하는 일에 관여했다. 하지만 유다인들의 반란이 계속되자 오레스테스 총독 또한 그의 행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성 키릴루스는 세속 정부의 권위를 인정하며 유다인들 문제에서 손을 뗐다.

   성 키릴루스는 신학적으로 주로 알렉산드리아의 성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5월 2일)의 노선을 따르며 아리우스주의에 대항하였다. 정통 가톨릭 신앙을 지키기 위해 애쓰던 그는 430년에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인 네스토리우스(Nestorius)와 분쟁에 휘말렸다. 네스토리우스는 가톨릭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 동일하다고 가르치는 데 반해, 신성과 인성이 분리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성모님은 하느님의 어머니가 아니라 단순히 인간 예수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마리아에게 주어졌던 ‘하느님의 어머니(천주의 모친)’ 즉 ‘테오토코스’(Theotokos)라는 호칭을 사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이단에 빠지고 많은 성직자와 수도자들도 혼란을 겪게 되었다.

   성 키릴루스는 강론과 서한을 통해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을 반박하고 사람들이 이단에 빠지지 않도록 경고했다. 그리고 네스토리우스에게도 직접 편지를 보내 그의 주장을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이단에 빠진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자 그는 교황 성 코일레스티누스 1세(Coelestinus I, 4월 6일)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여, 430년 8월 로마에서 주교 회의를 개최하여 네스토리우스를 단죄하도록 교황을 설득했다. 그리고 그에 맞추어 성 키릴루스도 같은 해 11월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주교 회의를 열어 네스토리우스의 가르침을 단죄하고 교회 일치를 도모하고자 했다.

   그러자 네스토리우스는 교황이 아닌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에게 성 키릴루스를 이단으로 고소했다. 당시 네스토리우스가 총대주교로 있던 콘스탄티노플은 황제가 거주하던 곳이었다. 황제의 신임을 믿고 고소했지만, 황제는 이 문제를 독단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며 주교 회의를 소집했다. 그래서 이루어진 것이 431년의 에페수스(Ephesus) 공의회이다. 교황 성 코일레스티누스 1세는 성 키릴루스로 하여금 네스토리우스를 축출하도록 지시하였고, 성 키릴루스는 에페수스 공의회에서 교황의 특사 자격으로 의장직을 맡아 회의를 주재하였다. 이때 200명 이상의 주교들이 대거 참여하여 큰 성황을 이루었다.

   에페수스 공의회는 네스토리우스가 결백하다고 주장하는 안티오키아(Antiochia)의 총대주교 요한 1세(Joannes I)과 안티오키아 학파의 신학자들이 대거 몰려오기 전에 네스토리우스와 그의 추종 세력을 단죄함으로써 성 키릴루스의 승리로 끝났다. 네스토리우스는 결국 유배되었고, 이런 과정을 겪으며 그리스도론에 대한 교회의 정통 교리가 확고히 정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2년 후인 433년에 성 키릴루스는 안티오키아 학파와 화해를 이루었다.

안티오키아 학파는 에페수스 공의회에서 결의한 대로 마리아께 ‘하느님의 어머니(천주의 모친)’라는 칭호를 부여하는 것을 인정했고, 그리스도가 성부와 동일하며 인간 예수와 동일함을 인정하는,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동일하다는 결론에 합의했다. 성 키릴루스는 이러한 결의와 합의를 끌어내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고, 그래서 ‘성모 마리아의 신학박사’라는 별칭을 얻었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 이단이 사라지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 후로도 성 키릴루스는 모든 생애를 바쳐 이단 척결을 위해 사목적, 학문적으로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성 키릴루스는 삼위일체와 강생에 관한 교의 확립과 신학 논문 저술에 여생을 바쳤고, 그리스도교 사회에 깊이 뿌리박고 있던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와 네스토리우스주의를 배격하는 일을 지속해 교회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그는 알렉산드리아가 낳은 가장 위대한 신학자였다. 그의 저서는 정확한 사고와 명확한 전개 및 그 합당한 근거 제시로 후대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가 남긴 저서 중에는 구약과 신약 성경에 관한 여러 주석서와 많은 교의 신학 논문을 비롯해 배교자 율리아누스(Julianus) 황제에 대한 반박문과 편지 그리고 다양한 강론들이 전해져 온다. 그리스 교부의 한 명인 성 키릴루스는 1882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교회 학자로 선언되었다. 동방 교회에서는 6월 9일에 그의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 기도합시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이 세상에서'치릴로
'를 당신의 종으로 선택하시어

복음을 받아들이고 신앙을 꽃 피우게 하셨으니

 

당신의 충실한 종,聖 '치릴로'主敎의 轉求를 들으시고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어

우리 모두가 복음을 따라 살아갈수 있도록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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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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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베드로 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6.27

    + 慈悲와 사랑의 우리主 하느님 아버지 ,

    오늘 이 세상에서 '치릴로 '를
    당신의 從으로 선택하시어 信仰을 꽃피우게 하셨으니,
    저희가 그의 모범을 받들어 언제나 福音을 따라 살아가게 하시고,

    충실한 당신의 종, 聖'치릴로'大主敎의 轉求를 들으셔서,
    당신이 사랑하는 아들 정다니엘과 '문베드로'와 모든 患友들이
    완전히 病魔에서 벗어나는 주님의 慈悲를 통하여
    주님의 사랑을 깨닫는 恩寵을 베풀어 주소서.

    +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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