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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합니다

밉상 짱 예수님 -이지민-

작성자2천사|작성시간22.06.09|조회수116 목록 댓글 1

 

 

 

요즘에 내 몸이 심상찮다. 왼쪽 팔다리가 불편하기에 아무렴이면 오른쪽 팔다리를 더 쓸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런지 오른팔과 오른다리가 많이 아프다. 우선 다리가 너무 아프니 걷기도 힘들지만 피트니스 센터에 운동하러 가는 것도 석연치 않다.

일전에도 이런 수모를 수차례 겪었지만 그 때마다 이 아픔도 내가 살아 있으니 겪을 수 있는 거라며 다소 긍정적인 마음으로 어른스럽게 잘 이겨내왔다. 그렇잖은가. 내가 죽어 이 세상에 없다면 괴롭고 성가신 아픔이라 할지라도 못 느끼지 않는가. 기쁨이나 사랑이라면 더욱 좋겠지만 아픔이나 괴로움도 내 삶의 또 다른 소중한 부분인데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한다.

센터에 와서 날마다 하던 대로 근육 운동을 하려 다리 들어올리기를 한다. 힘만 죽도록 줘봤자 추가 까딱도 않는다. 하면서도 성호경을 골백번 했는데, 이런 나에게 하느님은 눈도 한 번 깜딱하지 않는 것 같다.

“주님!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 아멘. 저 힘듭니다. 너무 하십니당.저 안 보 이십니꺼? 제 아픔 주님께 다 봉헌합니다. 안 받아준다면 주님도 제 리스 트에서 짤라버릴고야요, 알았죠?”

하고 협박에 가까운 기도를 하며 다시 한 번 더 힘내어 올려본다. 말이 기도이지 지금 하는 것은 원통하고 분해서 하느님께 분풀이 하는 거랑 다름 없다.

이 때 쓸데없는 생각이 여유 있는 내 마음의 옆으로 비집고 들어온다.

‘내 다리가, 내 팔이, 내 불편한 몸이 그 가해자만 아니었다면…….’

하고 남 탓을 하기 시작한다. 매주 성당에 가서 마음에서 우러나와

“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제 큰 탓이로소이다, 그러므로…….”

하며 큰 소리로 기도했건만, ‘도로아미타불’이다.

 

 

 

나는 일반 사람들과는 달리 신앙 생활을 하게 되었다. 내 의지와는 상관 없이 어쩌면 신앙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느님이 만들어 놓으셨다. 그러나 지금은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누구보다도, 무엇보다도 감사하고 미칠 듯이 기쁘다.

나는 세계 어디를 가도 하나(1)인 가톨릭 교의 신자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기독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기독교는 파가 많아서 ‘하나(1)’라는 느낌이 없다. 그리고 가톨릭 교는 내가 아닌 남(무교, 불교, 이슬람 교 등)을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게 매력적이다.

예수님을 믿고 따라야 하는 가톨릭 교 신자이지만, 나에게 예수님은 참 얄밉다. 물론 나약한 우리 인간들이 쓰러지지 않고 행복하게 지낼 수 있게 ‘십계명(十誡命)’을 만드신 게 틀림없다. 사실 예수님을 모르고 살았더라면 대충 대강 대강 살았을 터이다. 그 분을 알아 믿고 지내니 피곤하고 힘든 점이 만만찮다. 거기에다 그 분의 계명까지 있으니 부담스럽기 이루 말할 수 없다. ‘원수를 사랑하라’고까지 하시니 괴롭다 못해 짊어지기 무거운 짐이다.

나는 가장 예민하던 청소년기에 횡단보도로 걸어가다가 승용차에 치이는 사고로 죽었다. 기적적으로 55일 만에 환생했다. 몸은 청소년이오나 생각이나 정신은 세상에 갓 태어난 아기랑 다름 없었으니 당사자인 ‘나’나 보호자인 ‘부모님’은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래도 어떻게 얻은 새생명이냐며 살아있음에 어제보다는 오늘이,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낫지 않냐며 소박한 믿음과 희망을 갖고 열심히 살아왔다. ‘인간 되기는 텄다’는 병원의 의사들에 대한 오기(傲氣)였는지도 모르겠다.

가톨릭 신자라면 누구나 다 하는 레지오 활동이나 봉사 활동 한 번 하지 못했지만 주일 미사 꼬박꼬박 빠지지 않고 부담스러운 주님의 계명대로 살려고 노력했다.

나의 마음에 상처를 남기고 끝도 없이 나를 괴롭히는 예수님, 생각만 해도 분노와 미움이 올라오는 그 가해자를 과연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을까? 용서……. 이것은 이 세상에서의 삶이 다할 때까지의 과제일지 모른다. 운전면허증을 땄다고 조수석에 여친을 태우고 장난질 하고 가다가 꿈도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한 순수한 어린 소녀(나)의 삶을 뭉개버린 그를 용서하고 사랑하라 하신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병원에서 퇴원하고 다니던 학교에 복학해서 그 가해자를 분명히 용서했더랬다.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살아야 하니까 그러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내 마음 또한 간사해서 몸이 아프거나 힘든 일을 겪으면 잊었던 그를 떠올린다. 이렇게 과거의 기억과 상처가 되살아나니 나를 못살게 군다.

내가 5여 년 앞서 발목 뼈를 부러뜨려 수술하고 아무 것도 못하고 누워서 죽만 먹고 똥오줌만 눌 때, 주님께 자비를 청하다가도 통증이 너무나 심해서 본능적으로 대들고 협박까지 일삼았다. 퇴원하여 고해성사에 참례했다. 누워서 일삼은 대듦과 협박 죄까지 모두 사죄했다.

‘나는 이제 죽었네.’

하며 벌벌 떨며 기다리는데 신부님이 의외의 말씀을 하셨다.

“남들과는 달리 주님께 협박도 하고 욕도 하는 자매님! 앞으로도 주님 떠나 지 말고 계속 협박하면서 그 자리 쭈욱 지키세요. 보속으로는 …….”

예수님은 분명 사랑하고 용서하며 살라고 하시면서도 우리 인간의 나약함을 잘 아셨을 것이리라. 우리가 그 분의 인격대로 좀 더 자비롭고 겸손한 삶을 살도록 바라시기 때문일 테다.

성당에 가면 신부님이나 수녀님이 너무 힘들어하는 내가 안쓰러워서 위로한답시고 주님이 나를 너무 예뻐하고 사랑하셔서 이렇게 ‘고통’이라는 선물을 주셨다고 말씀해 주시기도 했다. 정말 말이 안 된다. 선물이라면 내가 좋아하는 아이스케끼나 초콜릿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은가? 구지 사람들이 기피하는 ‘고통’으로 사랑을 표현하시는 주님, 더욱이 교통 사고로 나를 죽인 그 가해자를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하시니 주님은 나에게만큼은 딱 얄밉디 얄미운 밉상이다.

돌이켜보면 나도 옛날에 내 삶을 살아가기가 만만찮아 용서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처럼 이렇게 다시 부정적인 감정이 올라와도 괜찮을까.

 

 

누구나 그러하듯이 나는 일이 잘 흘러갈 때는 ‘감사합니다’와 ‘사랑합니다’를 외치는 지극히 평범한 가톨릭 교인이다. 그랬다가 몸이 죽도록 아프면 주님께 자비를 청하다가도 어서 낫게 해주시지 않으면 제 리스트(list)에서 잘라버리겠다고 경고한다.

가톨릭 교에서는 ‘고통’을 통하여 삶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은총을 구하게 된다.

성 아우구스띠노는 <신국론>에서 다양한 형태의 고통을 말했다. 헛된 사랑, 걱정과 분노, 실망과 두려움, 논쟁, 다툼, 반역, 미움, 격앙된 기쁨이다. 이 밖에도 재난에 대한 두려움, 사기와 상실감, 자연 재해와 더위 또는 추위, 폭풍과 태풍과 홍수, 천둥과 번개, 우박과 서리, 지진과 지각 변동, 건물 붕괴, 야생 동물의 습격과 예기치 않은 사고도 있다. 사실 이러한 고통 이야기는 끝없이 나열할 수 있다. 몸이든 마음이든 질병이나 고통을 피할 수가 없다. 우리 자신의 질병을 피했다고 하더라도 우리와 가까운 사람들이 병에 걸린다. 우리는 그들의 근심을 함께 느낀다. 심지어 애완 동물을 기르면서도 상실감과 슬픔을 배운다. 이처럼 고통은 존재 깊숙이 파고들어와 우리 삶에 얽혀 있다.

<준주성범>이라는 저서에는 현실적 고통을 넘어서는 방법을 배운다. “십자가는 언제나 대기중”이라고 했다. 고통스런 십자가는 언제나 당신을 기다리고 있고 당신이 어디로 도망가든 피할 수 없다고 했다. 십자가를 기꺼이 지면 십자가가 당신을 질 것이며 당신이 원하는 목표로 이끌어 갈 것이다. 더 이상 고통이 존재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그러나 기꺼이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짐이 되어 당신을 짓누를 것이다. 그러니 십자가를 져야 한다. 자기 십자가를 쫓아버리면 더 무거운 십자가가 쫓아올 것이다. 고통은 우리 안에서 기적(奇跡)을 낳는다. 기적이 고통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편안해지며 다른 고통 받는 사람들 곁에서 해결책을 제시하기보다 연민과 유대감을 보여줄 수 있다.

안락과 사치 한가운데서 비참해질 수도 있고, 반대로 성인들처럼 고통 한가운데서 행복할 수도 있다.

고통은 은총에 민감하게 만들어 ‘영적 안내자’라고도 한다. <거룩한 사랑의 계시>에서 줄리안은 그리스도의 수난에 실감나게 느끼기 위해 죽음의 병에 걸리게 해달라고 기도한 적이 있었다고 전한다. 그는 세 가지 상처를 바랐다. 회개의 아픔으로 인한 상처, 불쌍한 이들과 고통을 나누는 상처, 하느님을 그리워하는 상처다. 줄리안은 나흘 밤낮을 의식 불명상태에서 고통을 겪다가 병자 성사를 받고 고통과 비탄에서 벗어났다. 그 순간 줄리안은 인간의 몸으로 고통 받는 예수를 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예수가 왜 누구를 위해서 고통을 받았는지 묵상하면서 하느님 사랑의 의미를 깨달았다. 이 책에따르면 그리스도는 줄리안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를 위해 고통을 받았다. 이제 만족하는가? 네가 만족한다면 나도 만족한다. 너를 위해 수난 받는 것이 나한테는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며 한없는 즐거움이다. 내가 고통을 더 받을 수만 있다면 더 받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기쁨’ 안에서 고통을 받았다. 여기서 드러난 그 분의 한없는 사랑은, 그래서 한(恨)없는 사랑이다. 이것은 단순히 네 죄를 내가 대신 지고 고통을 받았다는 식의 ‘대속신앙’을 넘어선다. 그 분은 사랑 때문에 ‘어쩔 수 없이’가 아니라, 기꺼이 고통을 자청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고통 한가운데서 함께 계시려는 연민이 우리를 구원한다.

성인들이 고통을 민감하게 느끼고 기꺼이 받아낸 이유는 “쟁기가 굳은 땅을 엎어 물이 스며들게 하듯이, 고통도 굳은 마음을 열어 지혜를 받아들이게 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우리는 성취뿐 아니라, 실패를 통해서 약함에 의해 우리가 누구인지, 그 분이 누구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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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김민환 | 작성시간 23.11.30 그렇게 엄청난 고통 어찌 감내하셨습니까?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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