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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엣대주교님묵상

자비로운 주님의 마음(연중 제24주일)

작성자빠다킹신부|작성시간16.09.11|조회수193 목록 댓글 4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자비로운 주님의 마음(연중 제24주일)


복음 루카 15,1-32

그때에 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2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4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
5 그러다가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6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7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8 또 어떤 부인이 은전 열 닢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닢을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 안을 쓸며 그것을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지지 않느냐?
9 그러다가 그것을 찾으면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은전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10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
<11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12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13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14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15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17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18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20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21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22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24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25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26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27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28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29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30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31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32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2000.4.30일 마리아 파우스티나 수녀(1905. 8. 25–1938.10.5, 폴란드)를 성인으로 시성하고 부활 제2주일을 ‘하느님의 자비 주일’로 정하셨습니다. 세상이 복잡해질수록 사람들은 점점 더 주님의 자비를 필요로 하고, 주님 자비에 대한 경외심도 커지고 있습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수천 년 전부터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지만 사람들은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주님의 자비를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자비는 용서의 자비입니다.

인간의 역사는 배신의 역사이지만 주님의 역사는 언제나 용서해 주시는 자비의 역사입니다.

주님께서 행하신 많은 기적과 은총으로 유다인들은 이집트를 탈출할 수 있었지만 그 후에도 그들은 여전히 금송아지를 만들고 받들며 주님을 배신하였습니다. 분노하신 주님께서는 그들을 버리려 하셨지만 용서를 빌고 간절히 구원을 청하는 모세에게 주님의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비록 용서받지 못할 사람들이었지만 주님께서는 자비의 사랑으로 그들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또한 주님을 믿지 않았던 바오로 성인이었지만 주님으로 부터 회개의 은총을 받은 그는 끝내는 주님의 사랑을 선교하는 명예로운 사도가 되어, 자신처럼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주님의 자비를 얻게 된 것은, 나로 하여금 주님의 크신 자비를 보여주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돌아온 탕자’를 통해 모든 잘못을 용서하는 주님의 무한한 자비를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방탕한 아들이 돌아오기 전에 이미 아버지는 아들을 용서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들이 죄를 사죄하고, 사과를 하기 전에 이미 아들을 용서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모든 죄를 용서했을 뿐만 아니라, 헐벗고 굶주린 채 돌아온 방탕한 아들의 모습에 마음이 아픈 아버지는 새 옷과 새 구두를 주고 기름진 송아지를 잡아 연회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자비는 참으로 무한합니다.

주님의 자비는 조건 없는 자비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지은 죄를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주님의 자비는 무한하고 계산하지 않는 조건 없는 자비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인간의 계산으로 하셨다면, 99마리의 착한 양떼를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것은 나머지 양들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하고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잃어버린 동전 한 닢을 찾기 위해, 밝게 불을 켜고 온 집안을 청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동전 하나를 찾기 위해 너무 많은 낭비를 하는 것은 이치에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는 날 만큼, 많은 죄를 짓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 있는 만큼, 주님의 자비 또한 많이 받고 있습니다. 즉, 생명이 있는 만큼, 자비의 역사도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큰아들은 다시 돌아 온 방탕한 동생을 시기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방탕한 생활로 모든 돈을 탕진한 동생을 위하여 좋은 옷과 반지, 신발을 주시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배불리 먹이며 많은 돈을 낭비했습니다. 더구나 그러한 방탕한 동생을 껴안고 입까지 맞췄습니다. 이것은 인간적인 계산으로는 전혀 남는 것이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계산으로는 우리 모두는 주님의 자녀이기에 비록 죄를 지었어도 다시 돌아만 온다면 끌어안고 품어주시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똑바로 서 있을 수 있는 사람이 어느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의 죄로 우리 모두는 죽어 마땅하고, 오래 전부터 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주님의 자비는 배척하지 않는 자비입니다.

정직하고 올바른 아들을 아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릇된 일을 한 아들을 더 아끼고 자비를 베푼다는 것은 사실 이치에 맞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나 만일, 주님께서 인간의 이치대로 하셨다면 그것은 무한한 자비가 아닐 것입니다.

주님의 자비는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습니다. 주님의 자비는 대상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품어주는 거대한 바다와 같은 사랑입니다.

주님께서는 작고 보잘 것 없는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측은하게 생각하여 먼 길을 떠나셨습니다. 그리고 그 양을 찾아 어깨에 매고 돌아와 연회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부정한 여인과 세리, 못박힌 죄인, 장님으로 태어난 사람, 불쌍한 어린이, 그 모두는 주님의 자비 안에 있습니다.

주님을 멀리하는 사람, 작고 버림받은 사람, 오직 죄만 있을 뿐 아무런 가치도 없는 사람, 그 모두에게 주님께서는 자비를 베풀어주십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사랑과 관심을 주십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는 이토록 무한한 사랑을 주시는 것일까요? 주님의 무한한 사랑과 견줄 수 있는 것이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주님 자비의 무한한 사랑이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 저희가 주님의 무한한 자비 속에서 살고 있음에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삶 속에서 주님의 자비를 경험하였습니까?

2. 주님의 자비가 없이도 이 세상과 내가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3. ‘용서의 자비’, ‘조건 없는 자비’, ‘배척하지 않는 자비’ 외에 또 다른 주님의 자비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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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강민주(요안나) | 작성시간 16.09.12 끼엣 대주교님 묵상글을 보면서 늘 죄송한 마음입니다,
    질문에 하나도 당당하게 제대로 답해드릴수가 없으니 더욱 송구스럽지요
    오늘도 한없이 베풀어주시는 주님의 자비에대해서 감사드리며 깊히 묵상해봅니다,
  • 작성자peterlee | 작성시간 16.09.12 주님의 자비는 용서의 자비입니다. 한없는 자비심을 저희를 굽어보살피시는 주님께 머리숙여 자비를 청합니다. 아멘
  • 작성자아가페2 | 작성시간 16.09.13 주님의 무한한 사랑에 늘 감사하지요 99마리 중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러지 못함이 죄스럽습니다
    열심히 노력하며 봉사하며 1.2.3 번의 대답을 채울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작성자지성율리 | 작성시간 16.09.16 아멘~~!!
    주님의 자비 한 없이 기다려주시는
    무한한 자비로
    채워주시는 주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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