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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엣대주교님묵상

희생(연중 제32주일)

작성자빠다킹신부|작성시간16.11.06|조회수292 목록 댓글 2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희생(연중 제32주일)


복음 루카 20,27-38

그때에 27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28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를 남기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29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30 그래서 둘째가, 31 그다음에는 셋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일곱이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32 마침내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33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35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36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37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38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어느 방송에서 급성심근경색증으로 숨을 거둔 어떤 여인의 이야기가 방송되었습니다. 분명 그 사람은 숨이 끊어졌고 사망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수 시간 후 다시 깨어났습니다. 사람들이 그녀에게 숨이 멈춘 동안 무엇을 보았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가 하늘로 멀리 날아 높은 하늘에서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내가 혼수상태에 빠지자 의사, 간호사들이 모여들고 있었고 주위에 약품과 의료기가 어지럽게 널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흰색 테니스화도 보았는데 뒤꿈치 바닥이 닳아 헤진 운동화의 흰색 끈 한쪽이 신발 바닥 밑에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의사가 호기심으로 주변을 살펴 보았는데 병원 맞은 편 건물을 지나다 깜짝 놀랐습니다. 병원 3층 벽에 매달려 있는 테니스 운동화 한 켤레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 신발은 바로 그 여인이 묘사했던 운동화와 똑같았고 닳은 뒤꿈치와 흰색 끈이 운동화 바닥 밑에 깔려 있었습니다. 이후 미국과 독일에서 조사를 했는데 당시 그 여인은 사망했던 것이 확실하고 다시 살아난 것도 사실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다시 회생한 사람이 전세계에 1,370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회생을 경험한 사람의 말에 따르면, “저 세상에서 사는 모습이 이 세상보다 훨씬 더 행복했다”라고 합니다. 또한 저 세상을 경험한 사람들은 더 이상 죽음이 두렵지 않고 금전과 명예, 쾌락 등이 더 이상 그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은 바로 진정한 사랑과 넓은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삶이라고 합니다.

물론 이것만으로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증명할 수는 없지만, 오늘 주님의 말씀과 비슷한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회생을 경험한 사람들을 통해 다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 외에 또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 여인의 경험은 베트남 민족의 관념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베트남 사람들은 ‘죽는다는 것은 영혼이 바뀔 뿐, 여전히 살아있다’라고 믿습니다. 죽은 후에 다시 저 세상에서 살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조상을 숭배하고 제사를 지내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은 하느님의 교리와도 같습니다.

모세가 붉게 타는 가시덤불 속에 나타나신 주님을 보고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나는 아브라함과 이사야 야곱의 하느님이다”

모세 시대라면 아브라함이 세상을 떠난 지 거의 오백 년 이상이 지난 시기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하느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아브라함은 여전히 주님 곁에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주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부자와 라자로’,‘심판의 날’,‘씨와 가라지’등으로 비유하시며 죽은 후의 삶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허무의 지배 아래 든 것은 자의가 아니라 그렇게 하신 분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피조물도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의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19-23)

지금 세상에서 많은 어려움과 고통을 당하고 있기에 다음 세상에서는 보람되고 행복한 삶을 기대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복된 다음 세상을 낳기 위해’힘들고 어려움을 참고 견뎌야만 하는 임산부와도 같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세상의 삶은 지금의 삶과는 전혀 다른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두가이 사람의 질문에 답하시며 중요한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첫 번째 진리는, ‘선택된 사람만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반드시 다음 세상의 삶은 있지만 그 곳은 어느 누구나 갈 수 있는 세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나라에 들어 갈 자격이 있고 선택된 사람만이 들어 갈 수 있는 곳입니다.

주님께서는 복음을 통하여 이러한 선택 받음의 과정에 대하여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산양의 무리에서 양들을 끌고 나오시고 풀밭에서 잘 자란 벼를 뽑았습니다. 주님의 선택을 받을 수 있는 기준은, 산상설교의 ‘여덟 가지 참 행복’을 믿는 사람들이며 그 중 가장 첫째는 박애와 사랑입니다.

두 번째 진리는 하늘 나라에 선택을 받은 사람은 천사와 같아질 것이다

하늘 나라의 생활은 인간 세상의 삶과 전혀 다릅니다. 더 이상 배고프지도 목 마르지도 않으니 먹고 마실 필요가 없습니다. 시집이나 장가를 가지 않아도 됩니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살기에, 대를 잇기 위해 아이를 낳지 않아도 됩니다. 그렇다면 하늘 나라에 있는 나는 여전히 나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이 되어, 다른 삶을 사는 것입니까?

네, 나는 여전히 ‘나’ 입니다. 이것을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느 작고 예쁜 아이가 있습니다. 그 아이는 엄마 뱃속에서 움직이던 태아와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그럼에도 이 아이는 엄마 뱃속에서 움직였던 태아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90세의 늙은 할머니도 70년전에는 아주 아름다웠던 여인이었습니다. 지금 늙어 그 옛날 모습과 다르다고 다른 사람은 아닙니다. 그 둘은 하나입니다.

땅속에서 뒹굴던 못 생긴 애벌레도 전혀 다른 모습으로 꽃 주위를 맴도는 나비가 되었지만 그 둘은 하나입니다.

하늘 나라에서 우리는 전혀 다른 생활을 할 것입니다. 먹고 마시지 않고 결혼도 하지 않는 생활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여전히 ‘나’입니다. 비록 다른 점이 있겠지만 그래도 계속되는 세상입니다.

세 번째 진리는 나도 주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오랜 방랑을 끝내고 부모에게 돌아가는 자식과 같습니다. 무한한 갈망을 찾아 헤맸던 갈증들을 주님께서는 행복으로 가득 채워주십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 주님은 주님을 위해 저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 곁에 갈 때까지 제 마음이 항상 불안하고 근심스러웠습니다.”

주님의 자녀이기에 삼위일체의 삶을 이루는 것이 가장 큰 행복입니다. 삼위일체의 삶의 행복의 근원에 대해 바오로 성인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당하는 고통은 훗날 우리가 얻을 행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모든 피조물은 해방되는 날을 기다리며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로마 8, 22).”

이러한 행복을 위해, 제1독서에서 어머니와 일곱 명의 자녀는 지독한 처형을 감수했던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많은 희망을 줍니다. 주님은 우리의 삶이 더 이상 속절없이 흔들리고 헛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우리의 삶은 목적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근원이신 주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더 이상 고통스런 삶에 사로잡히지 않고 주님의 자녀가 된다면 삼위일체의 삶 속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은 사라지지 않고 주님의 영광 속에서 영원히 자유롭게 발전할 것입니다.

비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묻히지만, 강한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이 있으면 영적인 몸도 있습니다.(1코린 15,43-44)

주님! 다음 세상에서도 주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자격을 얻을 수 있도록 하루 하루를 주님의 말씀대로 살게 하여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죽음은 끝이 아니라 삶의 한 부분입니다.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까?

2. 인간은 죽기 위해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살기 위해 태어난다고 합니다.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3. 다음 세상은 주님과의 삶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기 위하여 지금 나는 무엇을 준비해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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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허니리니 | 작성시간 16.11.06 아멘!감사합니다~^^
  • 작성자강민주(요안나) | 작성시간 16.11.07 죽음에 대해서 생각은 해봤지만 죽음이 멀리 있다고만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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