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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엣대주교님묵상

양들의 문(부활 제4주일)

작성자빠다킹신부|작성시간17.05.07|조회수163 목록 댓글 0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들의 문(부활 제4주일)


복음 요한 10,1-10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다. 2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 3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4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5 그러나 낯선 사람은 따르지 않고 오히려 피해 달아난다.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 이야기하시는 것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하였다.
7 예수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8 나보다 먼저 온 자들은 모두 도둑이며 강도다. 그래서 양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9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10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문은 들어오고 나가는 데 사용됩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의 문이 있습니다. 죄인들을 가두는 감옥 문,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가리고 닫아 둔 양심의 문, 외부 세계와의 차단을 위한 고립의 문 등.... 이런 문들은 죽음과 파괴를 의미하는 닫힌 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어둠의 문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신선한 공기와 바람, 밝은 햇빛이 통하는 문도 있습니다. 허세를 버리고 넓고 숭고한 영혼의 세계로 나가는 문, 사랑으로 형제 자매를 받아들이는 문도 있습니다. 이러한 문들은 바로 생명으로 가는 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나는 양들의 문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양을 가두는 문이 아니라 항상 열려 있는 문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것을 차별 없이 받아들이는 아주 넓게 열려있는 문이십니다.

종종 우리는 지구 종말에 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러한 이야기의 근원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영원하지 않으며 인간의 생명 또한 쉽게 깨어지기 쉬운 덧없는 운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잘못된 신념에 의한 낭설이지만 물질적 세계에 갇혀 있는 많은 사람들은 그 말에 현혹된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절망의 감옥과 같은 어두움 속에 묻힌 인간을 벗어나게 해 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무덤을 막고 있는 어둠과 단절의 돌문을 부수어 인간에게 어두운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의 문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 문은 그 어떤 권력과 운명으로도 다시 닫히지 않는 영원한 열린 공간으로 인도하는 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문을 통해 부활하신 바로 그 순간부터 인간은 더 이상 육신이 소멸되는 심판을 받지 않아도 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영원히 죽지 않는 영광스러운 육신을 입으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때부터 인간은 더 이상 물질의 감옥에 갇히지 않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더 이상 제한된 공간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이 살수 있는 성령의 세계로 나가는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것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세계, 어떠한 제한도 없는 열린 세계, 새로운 영혼의 세계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주심으로써, 물질 세계의 경계를 없애고 무한한 세계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꿈과 희망에 날개를 달아주셨습니다. 이제 인간의 꿈은 더 이상 제한된 세계에 갇히지 않기에 별과 달처럼 무한히 날아 성령의 꿈을 꿀 수 있습니다. 또한 인간을 나약한 물질의 노예에서 해방시켜주시고 하느님 자녀로서의 고귀한 삶을 부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원천을 향하는 문이십니다. 사람이 죽기 위해 산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또한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차라리 살지 않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정신적 고통에 신음하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희망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살아있어도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그러한 삶이라면 살아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육체의 죽음을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고통을 겪으신 후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분께서 절망과 주검의 무덤을 열고 나오셨다는 것은 인간이 새로운 삶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새로운 삶이란 완전하고 영원한 생명, 죽음의 그림자 조차 없는 완전한 생명을 의미합니다. 새로운 삶이란 충만한 생명, 고통과 질병, 굶주림과 갈망이 없는 삶을 의미합니다. 새로운 삶이란 바로 인간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영적인 생활과 주님의 삶을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새로운 삶이란, 완전한 사랑 안에서 삼위일체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행복한 삶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인간은 더욱 풍부하고 발전하며 더욱 더 완전해지기 위해 저 높은 고귀한 곳을 향해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비록 삶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새 생명이 태어날 때 축복을 주고 생일을 축하하는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인간이신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가 죽기 위해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원천 안에서 완전하고 영원한 삶을 살기 위해 태어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에게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무한한 지평을 열어주기 위하여 당신 스스로 나약하고 유한한 고통스러운 인간의 운명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인간에게 생명의 원천을 주기 위하여 당신께서는 고통스러운 죽음을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양의 무리를 위해 생명을 바치신 진정한 목자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양의 무리가 푸르른 들판에서 목초를 뜯어먹고 영원한 생명수를 만날 수 있도록 넓은 지평선까지 인도하시는 진정한 문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양들에게 풍부한 양식을 주시며 돌보시는 진정한 목자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고 그 생명을 풍부하게 하여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생명에 도달하는 유일한 문이십니다. 그러므로 항상 그분의 발자취를 따르고 유일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십시오.

끝없는 지평선에 도달할 수 있도록 그분께 가까이 가십시오. 고통과 상처를 치유하고 생명을 회복할 수 있도록 그분께 가까이 가십시오. 우리의 영혼에 끝없는 사랑과 생명을 베풀어주실 수 있도록 그분께 가까이 가십시오.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예수님께서는 양들의 문이십니다. 지금 그 문으로 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 아니면 잘못된 다른 문으로 들어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2. 예수님께서는 넓은 지평선을 열어주시는 문이십니다. 나는 다른 사람을 위해 그 문을 열어두고 있습니까? 아니면 굳게 닫고 있습니까?

3.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위해 생명을 바치셨습니다. 나도 예수님처럼 더 넓은 문을 열기 위해 희생할 준비가 되어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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