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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엣대주교님묵상

빛의 증거자(대림 제3주일)

작성자빠다킹신부|작성시간17.12.17|조회수209 목록 댓글 0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빛의 증거자(대림 제3주일)


복음 요한 1,6-8.19-28

6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7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8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19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다.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 20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하고 고백한 것이다.
21 그들이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하고 묻자, 요한은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그 예언자요?” 하고 물어도 다시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2 그래서 그들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우리가 대답을 해야 하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오?”
23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24 그들은 바리사이들이 보낸 사람들이었다. 25 이들이 요한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
26 그러자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27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28 이는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르단강 건너편 베타니아에서 일어난 일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여러 가지 빛이 있습니다. 문화적인 빛, 과학적인 빛, 영혼의 빛 등.. 빛을보기 위해서는 어떠한 조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물리적인 빛을 보기 위해서는 눈이 필요하고 과학적인 빛을 보려면 지식이 필요합니다. 문화적인 빛을 보려면 마음을 열어야 보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빛을 보기 위해서는 그 빛을 본 증거자가 있어야합니다. 세레자 요한이 바로 그리스도 빛의 증거자입니다. 그 분은 자신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를 증거하였습니다. 그 분의 생애를 통해 볼 수 있는 빛은 다음과 같습니다.

겸손의 빛

그는 자신이 누릴 수 있는 모든 영광을 거부했습니다. 자신은 위대한 엘리야도 예언자도 아니며 온 백성의 구원자도 아닌 그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생각했고 자신은 “구세주를 위해 신발을 들고 다니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겸손입니다. 그의 겸손이 그의 말을 더 설득력있게 만들었고 그가 증거하는 그리스도의 겸손과 영광까지 비추이게 하였습니다.

삶의 고행을 통해 비춰지는 의지의 빛

세례자 요한 성인은 그의 생애 대부분을 사막에서 은둔하며 살았습니다. 사막의 삶은 금욕을 의미합니다. 황량한 황야에서 짐승의 위협을 견디는 삶이 얼마나 고단하겠습니까? 낙타 털 옷을 입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사는 세상에서 가장 빈곤한 고행의 삶을 택했습니다. 자신을 극복하려는 그 의지의 빛은 자신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희망을 밝혔습니다. 그 빛은 비록 지금 이 세상에서는 물질에 묶여있는 인간이지만 미래의 희망을 지닌 거룩한 인간임을 의미합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의 빛은 지금 나의 삶을 비춰 희망을 잃어버리는 고단한 삶을 고귀하고 깊은 의미가 있는 삶으로 만들어 줍니다. 세례자 요한의 밝은 미래는 그리스도가 오심을 널리 세상에 알림으로써 사람들이 진정으로 그리스도 오심을 기다리는 세상입니다.

굴복하지 않는 자신에게 솔직함

자신에게 솔직했던 그는 자신을 그리스도로 오해하며 받들려는 영광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앞에 한 없이 작아지고 겸손하였습니다. 자신에게 솔직하였기에 자신을 알고 허세가 아닌 진정한 고행의 삶을 살았습니다. 훗날 헤로데왕이 형 필립보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한 것을 비난하다가 체포, 투옥되었고 결국은 이 일로 인해 죽음을 당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그의 증거를 더욱 밝게빛나게 합니다. 그 빛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참된 빛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나를 버리는 빛, 나를 잊는 빛

자신은 단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람이라고 여겼기에 자신을 버렸습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자신을 아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그는 자신은 단지 주님이 오실 수 있는 길을 여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유일한 구원자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자신을 희생했습니다. 군중들이 자신을 떠 받들려는 것을 거부하고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요한 1, 27) 그 많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자신을 떠났을 때 그는 자신의 임무를 완성했다고 만족해했습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요한 3, 30 ).

세례자 요한은 가장 완벽한 증거자입니다. 주님을 높이기 위해 자신이 겸손해져야 함을 알았습니다. 밝은 빛 가운데 주님을 드러내기 위해 자신은 어둠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스도를 알리기 위해 자신이라는 존재를 버려야 함을 알았습니다. 그 분은 주님의 길을 열어주신 분입니다. 그 분은 바로 빛의 증거자입니다.

대림시기에 우리는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제 우리가 그 길을 열어주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증거해 주시기를 바라고 우리가 주님 당신을 소개해 주시시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언제나 나는 주님의 길이 아닌 나를 위한 길만 열고 있습니다. 주님을 증거하는 대신 나 자신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소개하는 대신 나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주님이 오시기 위한 길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 지 세례자 요한을 통해 알려주셨습니다. 우리도 세례자 요한을 본 받아 빛을 증거하기 위해 빛 가운데 살아야 함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세례자 요한 성인은 자신은 단지 주님을 증거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도 주님을 증거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2. 세례자 요한 성인은 주님을 증거하는 사람이기에 자신을 버리는 겸손한 삶을 살았습니다. 과연 나는 어떻습니까?

3. 살아가면선 나의 관심은 주님을 증거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단지 나 자신을 증거하는 것입니까?

4. 이번 주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 무엇을 할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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