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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엣대주교님묵상

믿음과 평화(부활 제2주일)

작성자빠다킹신부|작성시간19.04.28|조회수178 목록 댓글 1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믿음과 평화(부활 제2주일)


복음 요한 20,1-31

19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28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30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31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주간 첫날 저녁,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오신 날 그 곳에 토마스는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토마스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자 그는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라고 하였습니다.

여드레 뒤 제자들이 다시 모인 날 토마스도 함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평화의 축복을 주신 후 토마스에게 이르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토마스가 예수님께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이라고 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직접 본 것만 믿는 믿음

다른 제자와 마찬가지로 토마스 또한 주님의 가르침을 듣고 주님의 기적을 보았습니다. 당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주님의 예언도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스승의 죽음에 의심을 가졌습니다.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는 권능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믿지만 당신께서 죽은 후 스스로 부활하셨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그토록 존경하고 믿었던 최고의 권능을 가진 분이 십자가위에서 숨이 끊어질 때까지 치욕을 당하는 것을 보았기에 절망과 실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토마스는 스승의 죽음 후 모든 것을 포기하고 현실을 회피하듯 엠마우스로 떠난 다른 두 제자와 달리 절망과 실망 속에서도 공동체에 돌아왔다는 것은 그의 믿음이 남아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록 스승으로부터 ‘보지 않고도 믿어야 한다’는 책망을 들었지만 그의 의심을 통해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확실히 믿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의심한 사람은 토마스뿐만이 아닙니다. 빈 무덤을 발견한 사람들 역시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예수님께 발라 드릴 향료를 들고 무덤으로 가면서 무덤 입구의 큰 돌을 어떻게 치워야 할지 걱정하였습니다. 그런데 무덤에 도착해보니 이미 그 큰 돌이 굴러져 있었고 무덤 안에는 하얗고 긴 겉옷을 입은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래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보아라, 여기가 그분을 모셨던 곳이다. 그러니 가서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렇게 일러라. ‘예수님께서는 전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대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

겁에 질려 도망치듯 무덤을 뛰쳐나온 그들은 집으로 돌아와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말했지만 그들 역시 여인들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토마스는 보지 않았기에 믿을 수 없었고, 여인들은 빈 무덤을 보았고 부활에 대해 보고 들었지만 믿지 않았습니다.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의심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모든 믿음을 과학으로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토마스는 자신의 신념을 확신하기 위해 증명을 원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주님의 부활을 이해시키려면 자신이 그것을 직접 보고 확인해야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주님을 만져본 후에야 그는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이라고 외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토마스의 행동은 아마 우리를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

토마스가 직접 본 후 믿는 것을 보고 주님께서는 또 다른 축복을 주셨습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예수님 시대의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직접 보았음에도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믿지 않았습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다’는 것이야말로 그 만큼 깊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과 ‘보아야만 믿는 사람’ 모두 믿음의 길을 가는 동안 많은 의심과 고난, 불안을 경험합니다. 스승의 ‘죽음’ 이후 제자들은 자신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 지 불안감에 두려워했습니다. 이제 스승의 사명을 어떻게 이어갈 지 알 수 없었고 자신도 없었습니다. 제자들의 절망과 불안을 아시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첫 번째 메시지는 성령과 함께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는 축복입니다. 이로써 제자들은 언제나 주님이신 성령과 함께 평화를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의 믿음은 여전히 흔들리고,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신 것처럼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평화를 기원 해주실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토마스의 ‘보지 않고는 믿지 않는 성격’으로 인해 다른 제자들 또한 예수님의 옆구리와 손의 상처를 직접 보고 예수님의 부활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축복을 받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증거하기 원하는 사람은 스스로 신앙의 모범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언제나 성경을 읽고, 성실히 미사에 참여하고 생활 속에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 안에서, 신앙 공동체에서 갈등과 불화로 분열된다면 다른 사람들이 어찌 그리스도를 소중하게 여길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권력을 탐하고, 양심을 팔고 다른 사람을 짓밟고 유린한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믿음을 설득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이 차별을 하고 배려를 모른다면 어떻게 그리스도가 옳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가정, 신앙 공동체를 주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주님의 자녀로서 올바른 생활을 하고 있다면 이웃에게 굳이 주님을 믿으라고 설득할 필요가 없습니다. 박애와 평등의 정신으로 사는 생활, 인내하며 참고 기다리는 겸손과 배려, 사랑의 삶이야말로 어떠한 아름다운 말보다 설득력이 있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의 첫 번째 편지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실천하면, 그로써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계명은 힘겹지 않습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긴 그 승리는 바로 우리 믿음의 승리입니다.”

믿음은 평화입니다. 믿음을 고백하고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예수님의 고난을 직접 겪은 사도들처럼 나의 믿음도 흔들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2. 나는 과연 보지 않았지만 주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입니까?

3. ‘평화의 축복’이 나에게 진정 평화를 주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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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발아래 | 작성시간 19.04.28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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