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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엣대주교님묵상

잃어버린 주님의 모습(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작성자빠다킹신부|작성시간19.06.16|조회수221 목록 댓글 2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잃어버린 주님의 모습(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복음 요한 16,12-15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2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13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14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15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모든 권력과 부를 누리고 있음에도 삶이 지루한 왕이 있었습니다. “나는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을 보고 느끼며 살아왔는데 아직도 보지 못한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이다. 잠시라도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다.” 왕은 자신의 마지막 꿈을 이루게 해주는 사람에게 어떠한 보상도 해줄 것을 약속했지만 그 어느 누구도 답을 가지고 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양떼를 모는 목자가 왕을 찾아왔습니다. “제가 폐하를 도와드리겠습니다.” 왕은 기쁜 마음으로 그를 따라 나섰습니다. 정상에 올랐을 때 목자는 왕에게 태양을 가리키며 올려다 보라고 했습니다. 하늘을 바라보는 순간 눈이 부셔 눈을 감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자네는 나를 눈멀게 할 셈인가?”라며 화를 냈습니다. “폐하, 이것은 하느님의 큰 영광 중 아주 작은 일부분일 뿐인데도 이처럼 눈을 뜨고 볼 수 없는데 어떻게 그 크신 하느님을 볼 수 있겠습니까? 폐하께서는 이제 다른 눈으로 그분을 찾으셔야 합니다.”

임금은 그 이야기를 듣고 맞는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의 지혜의 눈을 뜨게 해줘 고맙네. 이제 다른 질문을 하겠네. 그럼 하느님이 계시는 천국은 어디인가?” 목자는 다시 손으로 하늘을 가리켰습니다. “날아 다니는 새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공기가 있어 날 수 있습니다. 우리도 그 새들과 마찬 가지로 공기가 있기 때문에 살고 있습니다. 이 세상 모두는 하느님의 보호 하에 살고 있습니다. 폐하, 눈을 크게 뜨고 세상을 보고 귀를 열고 들어보십시오. 천국은 우리 발 아래에도 우리 머리 위에도 우리 마음 속에도 있습니다.”

왕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보고 들어보려고 애썼지만 여전히 알 수 없었습니다. 목자는 왕을 우물로 이끌었습니다. 왕은 깊은 우물의 수면을 내려다 보면서 물었습니다. “누가 저곳에 있나?” 목자가 답했습니다. “하느님이 계십니다”. “하느님을 볼 수 있다고?” “그럼요 볼 수 있습니다.” 왕은 우물을 쳐다 보았지만 반사된 자신의 얼굴만 보였습니다. 아니 내 얼굴만 보이는 데 하느님은 어디 계시다는 건가?” 목자가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지금 우물 속에 있는 분의 마음 속에 계십니다.”

왕은 가난한 양치기 목자가 자신보다 더 현명하고 많은 것을 가졌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왕은 그에게 감사를 표하고 궁으로 돌아왔습니다. 왕이 하느님을 보았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지만 모든 사람들이 왕이 겸손해지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왕으로 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있는 어디에도 계십니다. 단지 우리 마음 속에 계신 그 분을 발견하지 못하기에 멀리 계신 분, 낯선 분이라고 느끼는 것뿐입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그분을 느낀다면 결코 외롭지 않을 것입니다. 위대한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만드신 아름다운 세상, 그 중 하나가 바로 나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은 신비로운 분이십니다. 하느님 한 분만도 신비로운데 삼위 일체는 더 신비로움 그 자체입니다.

어느 농부가 아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밭으로 나가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열매를 많이 따려면 가지치기를 해야 해” 아들이 물었습니다. “왜 그래야 하죠?” 아버지가 대답하기를 “가지가 커서 열매를 찌르기 때문이야” 아들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훗날 농업대학교 들어가서야 그것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한 어린아이가 할머니, 어머니와 같이 할아버지 상여를 따라가며 물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왜 돌아가셨어요?” 엄마가 대답했습니다. “나이가 많아서 돌아가셨지.” 아이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할머니는 늙었는데 왜 아직 안 돌아가세요? 그리고 삼촌은 어린데 왜 돌아가셨어요?” 어머니는 아들의 총명함에 기뻐하면서도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훗날 아이는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 중 하나는 아마 사랑일 것입니다. 어떠한 사랑의 정의도 완벽하게 그 사랑의 의미를 표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신비롭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신비는 하느님의 신비이며 그 중 가장 고귀하며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삼위일체의 신비입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신앙과 기독교 생활의 핵심입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인간의 지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것이기에 신비라고 부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통해 사랑의 신비인 삼위일체의 신비를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된 사랑’

성부, 성자, 성령 삼위를 하나로 즉 삼위일체로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일체가 되었다는 것은 바로 완전한 결합을 의미하며 삼위가 하나의 옥좌에 앉아계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

‘봉헌의 사랑’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것을 아드님이신 예수님께 주셨습니다.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생명과 뜻과 그 모든 것을 다시 아버지 하느님께 바치셨습니다. 삼위일체란 나의 모든 것을 온전히 봉헌하는 놀라운 사랑입니다. 나를 위한 어떤 것도 남기지 않고 모든 것을 바치는 사랑입니다.

‘생명을 만드는 사랑’

봉헌은 사랑을 마르지 않게 합니다. 오히려 점점 더 충만한 사랑을 만들고, 주면 줄수록 더욱 풍부해지기에 그 사랑이 우주 만물에 흘러 넘치게 합니다. 삼위일체의 사랑이 계시는 곳에서는 인간은 무한한 사랑의 원천을 깨닫고 하느님 사랑을 지향하는 삶을 살기에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아버지 하느님 모습으로 창조되었습니다. 나의 모습이 바로 하느님의 모습이며, 형제 자매의 모습이 바로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이보다 더 무한한 하느님의 사랑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점점 주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습니다. 미움과 시기로 우리의 모습은 망가지고 일그러지고 있습니다. 내 얼굴과 이웃의 얼굴들은 주님이 주신 모습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변해가고 있습니다. 이웃의 모습에서 하느님을 볼 수 없다면 나의 얼굴에도 하느님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삼위일체의 모습을 따라 살아가야 함을 다시금 일깨워야 합니다.

이웃과의 나눔을 알고 사랑의 정신으로 살아가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 나 자신을 버리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버리고, 내가 가진 것을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나의 뜻을 버리고 온전히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신을 버릴 때만이 비로소 주님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삶을 위해 나 자신을 완전히 잊어버릴 때 우리는 주님의 사랑과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천국의 행복이며 우리 삶의 지향점입니다.

삼위일체이신 주님, 저희가 삼위일체의 사랑을 깨닫고 잃어버린 주님의 모습을 찾을 수 있도록 저희를 이끌어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사랑의 신비를 느껴보았습니까?

2. 이웃의 모습에서 하느님을 볼 수 있습니까?

3. 삼위일체 하느님은 행복의 원천입니다. 행복의 원천이신 하느님과 하나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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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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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nordic | 작성시간 19.06.16 아멘, 감사합니다 ♡♡♡
  • 작성자발아래 | 작성시간 19.06.16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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