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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엣대주교님묵상

주님의 무한한 자비(연중 제24주일)

작성자빠다킹신부|작성시간19.09.15|조회수175 목록 댓글 3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주님의 무한한 자비(연중 제24주일)


복음 루카 15,1-10

그때에 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2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4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
5 그러다가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6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7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8 또 어떤 부인이 은전 열 닢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닢을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 안을 쓸며 그것을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지지 않느냐?
9 그러다가 그것을 찾으면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은전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10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



1981 년 5 월 13 일,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성 베드로 광장에 요한 바오로 2 세를 환영하기 위해 수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순간 총소리가 울렸습니다. 2발을 맞고 쓰러지는 교황님을 본 사람들은 놀라움과 충격으로 광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교황님은 중상이었지만 즉시 외과수술을 받아 간신히 회복되셨습니다. 저격범인 23세의 알리 아차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고 살인미수로 재판에 회부되어 종신형이 선고되었습니다. 그 후 1984 년 더욱 놀랄 일이 있었습니다. 교황께서 자신을 저격했던 알리 아차와 대화하는 모습이 신문에 실렸습니다. 무슨 말을 주고 받았는지 알 수 없지만 교황께서 그의 손을 꼭 잡고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모습에서 사람들은 주님의 자비를 느꼈습니다. 그 모습은 마치 죄인들을 따뜻한 사랑으로 맞이하신 주님의 모습, 살아있는 주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대리자인 교황께서는 자신을 저격한 죄인을 사랑으로 포용하는 자비를 보여주셨습니다. 알리 아차야말로 주님의 품으로 돌아온 잃어버린 양입니다. 자신을 돌보는 목자를 죽이고 아버지를 죽였지만 온화하고 자비로운 목자는 그 아들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걸고 용서하고 포용하였습니다. ‘잃어버린 양’과 ‘은전 한 닢’, ‘돌아온 탕자’는 죄 지은 사람에 대한 주님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서로 다른 비유지만 그것은 모두 주님의 사랑, 주님의 자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100 마리의 양을 가진 주인이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자갈과 가시로 뒤 덮인 광대한 산을 헤매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가 과연 다른 99마리와 견줄 수 있는 가치가 있는 것입니까? 99마리를 가진 주인이 한 마리를 잃는다 해서 가난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온 산을 찾아 나서고 찾은 후에 행복해합니다. 한 마리는 숫자로 가늠할 수 없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세상살이가 힘들어질수록 사람들은 주님의 자비를 갈망하고 주님의 자비에 대한 경외심도 점점 커집니다. 주님께서는 수천 년 전부터 자비를 베푸셨지만 사람들은 느끼지 못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다시 한번 주님의 자비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용서의 자비

당신께서 행하신 기적과 은총으로 이집트를 탈출한 유다 사람들이 여전히 금송아지를 만들고 숭배하는 것을 보고 주님께서는 분노하셨습니다. 그러나 용서를 빌고 간절히 구원을 청하는 모세에게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음에도 주님께서는 자비의 사랑으로 그들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바오로 성인 역시 주님으로부터 회개의 은총을 받은 후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명예로운 사도가 되어 자신처럼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돌아온 탕자’를 통해 주님의 무한한 자비를 볼 수 있습니다. 방탕한 아들이 돌아오기 전에 이미 아버지는 아들을 용서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자비는 어리석을 정도로 무한한 사랑입니다.

조건 없는 자비

주님께서는 우리가 지은 죄를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자비는 무한하고 조건 없는 자비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인간의 셈법으로 한다면 어떻게 99마리의 착한 양떼를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설 수 있겠습니까? 잃어버린 동전 한 닢을 찾기 위해 밝게 불을 켜고 온 집안을 청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치에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살아 온 날 만큼 많은 죄를 짓고 있습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만큼 주님의 자비 또한 많이 받고 있습니다. 즉, 생명이 있는 만큼 주님 자비의 은총의 역사도 늘어나기 때문입니다. ‘주님 앞에서 똑바로 서 있을 수 있는 사람이 어느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의 죄로 우리 모두는 죽어 마땅하고 오래 전부터 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배척하지 않는 자비

성실하고 올바른 아들을 사랑하고 아끼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잘못한 아들을 더 아끼고 자비를 베푼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인간의 이치대로 하셨다면 그것은 무한한 자비가 아닐 것입니다. 주님의 자비는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습니다. 주님의 자비는 대상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품어주는 거대한 바다와 같은 사랑입니다. 주님께서는 작고 보잘것없는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해 먼 길을 떠나셨습니다. 그리고 그 양을 찾아 어깨에 매고 돌아와 연회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부정한 여인과 세리, 죄인과 장애자, 나약하고 불쌍한 어린이 그들은 모두 주님의 자비 안에 있습니다. 주님을 멀리하는 사람, 나약하고 버림받은 소외된 사람, 오직 죄만 있을 뿐 아무런 가치도 없는 사람, 주님께서는 그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니다. 주님의 무한한 사랑과 견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무한한 사랑 외에 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주님, 주님의 무한한 자비 속에 살고 있음에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저희를 축복해주셨지만 저희는 그 축복을 알지 못합니다. 저희가 사랑을 받고 사랑을 나눌 수 있는 따뜻한 사람이 되게 하여주소서. 저희 삶 또한 다른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중요한 생명임을 알게 하여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주님의 자비가 무한하지 않다면 나는 지금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2. 자비로운 아버지의 모습을 기억합니까? 자비로운 주님의 모습을 보았습니까?

3. 돌아온 탕자의 장남과 둘째 아들은 무엇이 다릅니까? 장남이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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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이은숙 | 작성시간 19.09.15 감사드립니다.
  • 작성자발아래 | 작성시간 19.09.15 아멘. 감사합니다.
  • 작성자☆별하나 | 작성시간 19.09.17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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