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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엣대주교님묵상

인자한 아버지(사순 제4주일)

작성자빠다킹신부|작성시간16.03.06|조회수255 목록 댓글 1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인자한 아버지


복음 루카 15,1-3.11ㄴ-32

그때에 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2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1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12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13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14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15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17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18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20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21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22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24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25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26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27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28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29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30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31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32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오늘 복음을 보통 ‘돌아온 탕자’라고도 하지만 그 표현은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돌아온 탕자’라고 하면 방탕한 아들이 돌아온 것에 초점을 맞춘 것이지만 사실 예수님께서 이러한 비유를 하신 까닭은 탕자인 아들보다 관대하고 인자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고귀한 사랑을 알려주시고자 하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비유는 마치 한편의 드라마와도 같습니다.

이기적인 아들과 아버지

이기적인 아들은 부모님이 살아계심에도 불구하고 재산을 요구했습니다. 그 당시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야 재산을 나누어줬습니다. 살아계신 부모님께 재산을 나누어 달라고 하는 것은 부모님이 빨리 돌아가시기를 바라는 것으로 불효를 의미합니다. 이기적인 아들은 돈이 생기자 방탕한 생활을 시작했고 돈을 낭비하면서도 그 돈을 모은 부모님의 눈물과 땀은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지 자신의 욕망만을 위하여 그 많은 돈을 허비하였습니다. 가진 것이 있을 때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았기에 모든 것을 탕진한 후 그 옆에 남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곤경에 처한 그를 도와주려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탕진하고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후에야 안락한 집과 아버지가 생각났습니다. 단지 자기중심적인 선택만을 하는 이기적인 사람의 표본입니다. 그러나 자식을 위해 자신까지도 버리는 아버지는 아들이 재산을 요구하자 자식의 행복을 위해 두말없이 재산을 주었습니다. 아들이 재산을 갖고 떠나버린 후 그는 밤마다 아들을 그리며 골목 밖까지 나가 기다렸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자식은 부모를 생각지도 않는 데 부모는 왜 이토록 자식만을 생각하고 그리워하고 있을까요? 아버지가 기다림에 지쳐가는 동안 아들은 오직 쾌락만을 즐기고 있었고, 아들이 당신의 돈만 바랄 때 아버지는 자신의 돈보다도 아들의 행복만을 바랬습니다.

이 복음에서 가장 감동적이고 벅찬 아버지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구절은 아마 아버지와 아들의 짧은 만남의 순간일 것입니다.

“아들이 아무리 멀리 있더라도 아버지는 아들을 볼 수 있습니다.”

비록 아들은 아버지를 보지 못했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한눈에 알아보았습니다. 어린 아들이 연로한 아버지보다 더 밝은 눈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언제나 아들을 그리워했던 아버지는 컴컴한 어둠 속에서도 금방 아들을 알아보았습니다. 아버지는 자식을 눈이 아니라 가슴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담고 있는 눈은 소중한 사람의 그림자조차도 알아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들은 사랑이 없었기에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젊고 밝은 눈을 가졌지만 사랑이 없다면 장님과도 같아 타인의 마음속에 있는 사랑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을 품은 아버지

사랑이 넘치는 아버지의 마음은 아들의 지난 잘못을 잊은 지 벌써 오래 전입니다. 오직 지금은 방탕했던 아들이 아니라 눈앞에 있는 남루하고 야윈 아들만 보일 뿐이기에 그토록 그리던 아들을 만난 기쁨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달려가서 아들의 목을 껴안은 아버지

아버지는 멀리 나갔다 돌아 온 아들이 예의를 갖춰 인사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달려가 아들을 껴안았습니다. 넘치는 기쁨과 사랑이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한 집안의 가장이고 어른이지만 아버지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달려갔습니다. 젊은 아들은 왜 아버지보다 먼저 달려가지 못했을까요? 그것은 아들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보다 작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는 마음은 병든 몸과 같습니다. 연로한 아버지는 체력으로 달려간 것이 아니라 사랑의 힘으로 달려간 것입니다. 사랑이 날개가 되어 그 사랑의 힘으로 날아간 것입니다.

아들에게 입을 맞춘 아버지

어떤 표현으로도 잃었던 아들을 만난 아버지의 기쁨을 표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넘치는 사랑은 입맞춤으로도 부족하였기에 아들이 다시는 더 이상 멀리 가지 못하도록 꼭 껴안았습니다. 아들이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은 짧은 순간이었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알아보고, 넘치는 사랑을 느끼고, 달려가서, 포옹하고 입을 맞추는” 여러 일들을 했습니다.

아들이 어떤 것도 하지 않은 그 짧은 시간에, 연로한 아버지는 순간적으로 많은 행동을 한 것입니다. 아버지는 방탕한 아들을 위해 많은 것을 낭비했습니다. 너무 쉽게 재산을 나누어 줬고 돌아온 탕자를 위해 좋은 옷과 신발을 가져다주고, 손에 반지를 끼워주고 잔치를 열어주는 등 많은 것을 소비했습니다. 그러한 자신을 비웃는 사람들의 이목은 전혀 두렵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이치에 맞지 않는 너무 과한 사랑을 했지만 그 사랑하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사랑은 이론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황폐한 영혼의 큰아들과 아버지

반면 형은 동생이 떠난 후에도 계속 집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집에 있었던 것은 그의 육체일 뿐이었습니다. 동생이 재산을 갖고 떠나 간 후부터 그의 영혼은 황폐해졌습니다. 몸은 비록 가족과 함께 있었지만 마음은 이미 가족을 떠났고 열심히 일했지만 효성이 아니라 마치 하인처럼 돈을 받기 위해 일했고 자신만을 생각했습니다. 비록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음에도 이미 멀어진 마음은 아버지의 마음 속 깊은 곳의 슬픔과 사랑을 알려고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큰 아들 역시 사랑했지만 아들은 그저 동생에게 재산을 나눠 준 아버지를 원망만 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여전히 포용하고 있었으나 편협한 마음을 가진 아들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넓고 열린 영혼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들은 꼭 닫힌 영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큰아들이 불만과 비판만을 할 때, 아버지는 단지 용서만을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달랐습니다.

큰아들을 찾아 떠난 아버지

아버지는 다시 한 번 황폐한 영혼을 가진 아들을 찾아 식사도 거르고 집을 나서야 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만나 전과 다름없는 인자하고 온화한 말과 따뜻한 눈길로 아들을 보듬으며 집에 돌아오도록 설득하였습니다. 돈을 탕진한 작은아들에게 필요한 것은 집에 돌아오는 것 뿐이었다면 황폐한 영혼으로 떠난 큰아들에게 필요한 것은 아버지와 동생, 두 사람에게 돌아오려는 마음입니다.

이처럼 아버지를 떠나 황폐해진 마음이 다시 인자한 아버지 품으로 돌아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큰 아들 또는 작은 아들 중 어떤 쪽에 속하더라도 모든 사람은 반드시 아버지께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 겉으로 보는 나의 삶이 황폐하지 않다고 할지라도 나의 영혼은 여러 번 아버지 곁을 떠나 방황하였을 것입니다. 그것은 나의 행동과 생각이 아버지이신 주님의 뜻과 점점 멀어져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라도 편안히 주님께 돌아 갈 수 있습니다. 아마 인자한 아버지께서는 벌써 나를 찾아 골목 밖까지 나와 기다리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그분은 바로 내가 그분을 사랑하기 이전부터 나를 사랑하신 분이시고, 내가 그분을 찾기 전부터 이미 나를 찾으시고, 내가 그분에게 용서를 구하기 전에 이미 나를 용서해 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인자한 아버지이신 주님,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오늘 비유의 아들 중 나는 누구와 더 비슷합니까?

2. 아버지이신 주님의 인자한 사랑을 느끼고 있습니까?

3. ‘인자한 아버지’중 어떤 부분이 가장 감동적입니까?

4. 주님이신 아버지께 돌아가기 위해서는 어떤 참회가 필요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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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허니리니 | 작성시간 16.03.0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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