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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근 신부 강론

2022년 10월 3일 연중 제27주간 월요일

작성자푸른잎새|작성시간22.10.02|조회수387 목록 댓글 11

▥ 제1독서

<사도 바오로의 갈라티아서 말씀 1,6-12>


형제 여러분,

6 그리스도의 은총 안에서 여러분을 불러 주신 분을 여러분이 그토록 빨리 버리고 다른 복음으로 돌아서다니,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7 실제로 다른 복음은 있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을 교란시켜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하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8 우리는 물론이고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 우리가 여러분에게 전한 것과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
9 우리가 전에도 말한 바 있지만 이제 내가 다시 한번 말합니다.
누가 여러분이 받은 것과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
10 내가 지금 사람들의 지지를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까?
하느님의 지지를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는 것입니까?
내가 아직도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는 것이라면, 나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종이 아닐 것입니다.
11 형제 여러분,

여러분에게 분명히 밝혀 둡니다.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12 그 복음은 내가 어떤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받은 것입니다.

 

 

✠ 복음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10,25-37>


그때에

25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2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27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8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29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30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31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2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3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34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35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6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37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오늘 복음은 어떤 율법교사와 예수님과의 두 번의 대화로 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대화에서 율법교사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루카 10,25)

 

이 질문은 아주 중요한 질문이기는 하나, 율법교사의 편견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곧 그는 ‘무엇인가를 해야’ 구원을 받으리라 여기고 있습니다.

마치 스스로의 ‘행실’로 구원을 얻으리라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이 자신의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은 그분께 메여있는 ‘존재’임을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곧 구원은 ‘무엇을 하느냐?’는 행위의 문제라기보다 ‘어떤 사람이 되느냐?’라는 존재의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소임을 맡느냐가 중요하기보다 사랑으로 그 소임을 수행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곧 '마음과 목숨과 힘과 정신을 다하여 사랑하는 사람'(루카 10,27)이 되는 일입니다.

 

두 번째 대화에서 율법교사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누가 제 이웃입니까?”

(마르 10,29)

 

이 질문 뒤에도 역시 그의 옹졸한 마음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곧 사랑의 대상에 한계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의 사랑의 대상에는 사마리아인이나 이방인은 제외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반문하십니다.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

(마르 10,36)

 

예수님께서는 누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가에 대해 대답하기보다 오히려 ‘모든 이웃이 사랑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곧 우리는 모두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이웃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모두에게 이웃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나아가서 우리는 단지 이웃이 아니라 형제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 역시 ‘누가 나의 이웃인가? 라는 문제보다 ‘나는 이웃이 되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먼저 응답해야 할 일입니다.

‘그가 나의 형제인가? ’묻기에 앞서, ‘나는 그의 형제가 되어주고 있는가?’를 물어야 할 일입니다.

곧 내가 필요로 여기는 사람을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여기는 사람을 우선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루카 10,37)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주님, 저희가 자비를 입었으니, 저희도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라고 기도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오늘 복음의 핵심 메시지는 첫 번째와 두 번째 대화의 마지막 구절에 있습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루카 10,28;37)

 

이 말씀은 아는 것에 멈추지 말고 행동으로 실행하라는 요청입니다.

말로만 하지 말고 몸으로 하라는 말씀이요, 의무적으로나 형식적으로 하지 말고, 자발적으로 사랑으로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알 때가 아니라 그렇게 실행할 때 살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

(루카 10,36)

 

주님!

초라해진 저의 모습을 봅니다.

초주검을 당해 쓰러진 이들이 여기 저기 웅크리고 있는데, 저는 그들과는 반대방향의 열차에 앉아 길을 피해 달아납니다.

강도 맞은 이를 여관으로 옮겨 돌보아 준 사마리아인의 용기와 사랑 앞에 부끄러움의 고개를 숙입니다.

말없는 그의 헌신과 뒷날까지 챙겨주면서도 고요히 떠나는 그가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주님!

제 안에 사랑을 담을 수 있게 하소서!

측은히 여기는 마음과 용기를 담을 수 있게 하소서!

제 안에, 기꺼이 손해 보는 자유를 담을 수 있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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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가을비 | 작성시간 22.10.03 아멘~감사합니다
  • 작성자예은 루치아 | 작성시간 22.10.03 아멘!
    감사합니다...
  • 작성자들꽃1 | 작성시간 22.10.03 아멘! 감사합니다!
  • 작성자아낄래요 | 작성시간 22.10.03 감사합니다.~!
    오늘도 건강하시고
    행복한 하루 되세요.~ ^^
  • 작성자조나단 | 작성시간 22.10.03 아멘 고맙습니다.
    강론 써 주신 신부님 늘 올려주신 푸른잎새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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