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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근 신부 강론

2022년 11월 14일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작성자푸른잎새|작성시간22.11.14|조회수216 목록 댓글 6

▥ 제1독서

<요한 묵시록의 시작 1,1-4.5ㄴ; 2,1-5ㄱ>


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하느님께서 머지않아 반드시 일어날 일들을 당신 종들에게 보여 주시려고 그리스도께 알리셨고, 그리스도께서 당신 천사를 보내시어 당신 종 요한에게 알려 주신 계시입니다.
2 요한은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 곧 자기가 본 모든 것을 증언하였습니다.
3 이 예언의 말씀을 낭독하는 이와 그 말씀을 듣고 그 안에 기록된 것을 지키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그때가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4 요한이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이 글을 씁니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또 앞으로 오실 분과 그분의 어좌 앞에 계신 일곱 영에게서,
5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나는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2,1 “에페소 교회의 천사에게 써 보내라.
‘오른손에 일곱 별을 쥐고 일곱 황금 등잔대 사이를 거니는 이가 이렇게 말한다.
2 나는 네가 한 일과 너의 노고와 인내를 알고, 또 네가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사도가 아니면서 사도라고 자칭하는 자들을 시험하여 너는 그들이 거짓말쟁이임을 밝혀냈다.
3 너는 인내심이 있어서, 내 이름 때문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지치는 일이 없었다.
4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것이다.
5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

 

 

✠ 복음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18,35-43>


35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의 일이다.
어떤 눈먼 이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36 군중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37 사람들이 그에게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 하고 알려 주자,
38 그가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39 앞서 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40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셨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41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가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42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43 그가 즉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
군중도 모두 그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오늘 복음은 예리고의 눈먼 거지(바르티메오)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는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다른 이들의 꾸짖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악을 쓰듯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루카 18,39)

그 당시의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에게서 나온다는 이사야 예언서(11,1)의 말씀을 믿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가까이 오자 물으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루카 18,41)

 

예수님께서는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으시고, 그의 믿음을 유도하고 고백하게 하기 위해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물으십니다.

곧 당신께 대한 믿음을 묻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청원기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곧 첫째는 믿음으로 청하는 일이요, 둘째는 자신이 바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주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청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진정 청해야 할 바를 청하는 일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는지 빤히 아시지만, 당신께 대한 믿음을 보고자 하십니다.

 

거지 장님은 신뢰와 의탁으로 청합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루카 18,41)

 

그런데 대체 무엇을 보아야 ‘다시 본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사용되고 있는 “보다’(anablefo)라는 단어는 ‘위를 쳐다보다’, ‘새로운 것을 보다’, ‘다시 보다’, ‘시력을 회복하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인이 눈을 뜨기 위해서는 바라보아야 할 대상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 ‘위에’ 달리신 예수님을 쳐다보는 일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그분의 사랑을 보게 될 때, 비로소 눈을 뜨게 될 것입니다.

 

결국 그분의 ‘사랑을 보는 눈’이 다시 보는 눈이요, 새로운 눈이요, 영적인 눈인 것입니다.

그것은 육신의 눈을 치유 받는 것을 넘어서, 영혼의 눈을 뜨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믿음’이 ‘다시 보게 하고 구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루카 18,42)

 

이제는 보려고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태어나면서 물질의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면, 이제는 ‘믿음’을 통해서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떠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그분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는 일이요, 지금 우리의 길을 동행하고 계시는 그분을 보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제 '길가'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동행하시는 주님을 '따라' 따라나서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루카 18,41)

주님!

제가 보지 못함은 태양이 떠오르지 않아서가 아니라 눈을 감고 있고 있는 까닭입니다.

눈을 뜨지 않으려는 완고한 마음 때문입니다.

성전 휘장을 찢듯, 제 눈의 가림막을 걷어 내소서!

완고함의 겉옷을 벗기시고, 깊이 새겨진 당신의 영혼을 보게 하소서!

 

주님!

제가 볼 수 있음은 눈을 뜨고 있어서가 아니라 빛이 저를 비추는 까닭입니다.

제 안을 비추는 당신 사랑을 보게 하소서.

제 안에 벌어진 당신 구원을 보게 하소서.

제 안에 선사된 당신을 보게 하시고,

제가 바라고 싶은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해주고 싶은 것을 바라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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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들꽃1 | 작성시간 22.11.14 아멘! 감사합니다!
  • 작성자감사하는 | 작성시간 22.11.14 아멘
  • 작성자가을비 | 작성시간 22.11.14 아멘~감사합니다
  • 작성자발아래 | 작성시간 22.11.14 아멘. 감사합니다.
  • 작성자돈보스코 | 작성시간 22.11.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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