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이영근 신부 강론

2023년 2월 1일 연중 제4주간 수요일

작성자푸른잎새|작성시간23.01.31|조회수264 목록 댓글 11

제1독서
▥ 히브리서의 말씀 12,4-7.11-15

 

형제 여러분, 

4 여러분은 죄에 맞서 싸우면서 아직 피를 흘리며 죽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5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시면서 내리시는 권고를 잊어버렸습니다.
“내 아들아, 주님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을 받아도 낙심하지 마라.
6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
7 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십니다.
아버지에게서 훈육을 받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
11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련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12 그러므로 맥 풀린 손과 힘 빠진 무릎을 바로 세워
13 바른길을 달려가십시오.
그리하여 절름거리는 다리가 접질리지 않고 오히려 낫게 하십시오.
14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고 거룩하게 살도록 힘쓰십시오.
거룩해지지 않고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입니다.
15 여러분은 아무도 하느님의 은총을 놓쳐 버리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십시오.
또 쓴 열매를 맺는 뿌리가 하나라도 솟아나 혼란을 일으켜 그것 때문에 많은 사람이 더럽혀지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십시오.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6,1-6

 

그때에 

1 예수님께서 고향으로 가셨는데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
2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3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5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6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서 나와 고향 나자렛으로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놀라워했습니다.’(마르 6,2)

그러나 받아들이지는 않고 오히려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마르 6,3)

그런데 그들은 왜 예수님을 놀라워하면서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못마땅하게 여긴 것일까?

사실 그들은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그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마르 6,2) 하고, “그분의 지혜와 기적의 힘”에는 놀라워했지만, 그 지혜와 힘이 어디에서 온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권위를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사실은 자신들의 ‘무지’, 곧 그분의 지혜와 힘의 원천을 알지 못하는 자신들의 무지를 인정하지 않은 까닭이었습니다.

동시에 자신들이 그분에 대해 알고 있는 ‘앎’을 내려놓지 않은 결과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우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마르 6,3) 

이처럼 그들은 ‘그를 안다’는 자기 생각, 곧 자신들의 고정관념, 선입관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곧 ‘자신들이 안다’고 여기는 생각이 바로 완고함과 불신을 불러오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결국 자신이 안다고 여기는 생각을 믿고 섬기고 따른 우상숭배에 빠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고집부리는 사울을 꾸짖을 때, 사무엘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1사무 15,23) 

그렇습니다. 

잘못된 믿음, 곧 자신이 만들어 놓은 우상의 하느님을 믿게 되면, 참 하느님을 믿지 못하게 되는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금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칼 라너의 표현은 우리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켜줍니다.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하느님은 안 계십니다.”

사실 우리는 이 우상을 벗어나야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게 됩니다.

믿음은 자기에게서 빠져나와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지, 하느님을 자기의 좁은 지식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곧 믿음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뛰어넘어 ‘있는 그대로’의 그분의 인격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비록 자신이 알고 있는 그러한 예수님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분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리지외의 데레사 성녀는 말합니다.
“하느님 사랑을 위하여 저는 가장 낯선 생각들도 받아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신의 앎’에 대한 완고함으로부터 벗어나고, 동시에 ‘자신의 무지’에 대한 어리석음을 인정해야 할 일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하느님을 끌어당기는 자석과 같고, 완고함은 불신의 씨라 할 수 있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마르 6,4)

 

주님!

스승을 곁에 두고도 존경하지 않은 저는 수술을 받아야 살 수 있는데도 의사를 믿지 않아 수술을 받지 못한 어리석은 환자입니다.

제 앎을 뛰어넘는 당신을 믿지 못하는 저는 안다는 제 생각을 섬기고 따르는 우상숭배자입니다.

주님, 존경을 겸손의 표지로, 믿음을 응답의 표지로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바람의노래 | 작성시간 23.02.01 아멘 감사합니다!
  • 작성자아낄래요 | 작성시간 23.02.01 감사합니다.~
    오늘도 건강하시고
    행복한 하루 되세요.~^^
  • 작성자감사하는 | 작성시간 23.02.01 아멘
  • 작성자발아래 | 작성시간 23.02.01 아멘. 감사합니다.
  • 작성자가을비 | 작성시간 23.02.01 아멘~♡감사합니다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