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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근 신부 강론

2023년 6월 10일 연중 제9주간 토요일

작성자푸른잎새|작성시간23.06.10|조회수253 목록 댓글 8

제1독서
▥ 토빗기의 말씀 12,1.5-15.20

 

그 무렵 

1 토빗은 자기 아들 토비야를 불러 말하였다.
“얘야, 너와 함께 갔던 사람에게 품삯을 주고 또 품삯 외에 더 얹어 주도록 배려하여라.”
5 그리하여 토비야는 라파엘을 불러, “그대가 가지고 온 모든 것의 절반을 품삯으로 받고 안녕히 가시오.” 하고 말하였다.
6 그때에 라파엘이 그 두 사람을 은밀히 불러 말하였다.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잘해 주셨으니, 살아 있는 모든 이 앞에서 그분을 찬미하고 찬양하여라.
그리고 그분의 이름을 찬미하고 찬송하여라.
하느님께서 하신 일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모든 사람에게 알리고, 그분을 찬양하기를 게을리하지 마라.
7 임금의 비밀은 감추는 것이 좋고, 하느님의 업적은 존경하는 마음으로 드러내어 밝히는 것이 좋다.
선을 행하여라. 

그러면 악이 너희에게 닥치지 않을 것이다.
8 진실한 기도와 의로운 자선은 부정한 재물보다 낫다.
금을 쌓아 두는 것보다 자선을 베푸는 것이 낫다.
9 자선은 사람을 죽음에서 구해 주고 모든 죄를 깨끗이 없애 준다.
자선을 베푸는 이들은 충만한 삶을 누린다.
10 그러나 죄와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은 바로 저희 자신에게 원수가 된다.
11 나는 이제 너희에게 아무것도 숨기지 않고 진실을 모두 밝히겠다.
나는 이미 너희에게 ‘임금의 비밀은 감추는 것이 좋고, 하느님의 업적은 공경하는 마음으로 드러내는 것이 좋다.’ 하고 분명히 밝혔다.
12 자 이제 보라, 너와 사라가 기도할 때에 너희의 기도를 영광스러운 주님 앞으로 전해 드린 이가 바로 나다.
네가 죽은 이들을 묻어 줄 때에도 그러하였다.
13 그리고 네가 주저하지 않고 잔치 음식을 놓아둔 채 일어나 가서 죽은 이를 매장해 줄 때,
14 너를 시험하도록 파견된 자도 나였다.
또 하느님께서는 나를 파견하시어 너와 네 며느리 사라를 고쳐 주게 하셨다.
15 나는 영광스러운 주님 앞에서 대기하고 또 그분 앞으로 들어가는 일곱 천사 가운데 하나인 라파엘이다.
20 이제 이 세상에서 주님을 찬미하고 하느님을 찬양하여라.
자, 나는 나를 파견하신 분께 올라간다.
너희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기록해 두어라.”
그러고 나서 라파엘은 올라갔다.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12,38-44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38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이르셨다.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39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40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
41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넣었다.
42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
그것은 콰드란스 한 닢인 셈이다.
43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44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다 넣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의 앞부분에서는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엄하게 질타하십니다.

남에게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높은 자리에 찾으며, 약한 자들의 재산을 등쳐먹으면서도 기도는 오래 바치는 위선의 삶을 질책하십니다. 

뒷부분에서는 예수님께서 렙톤 두 개를 봉헌한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높이 칭송하십니다.

부자들은 나름대로 여분의 것에서 일부를 바쳤지만, 이 과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기에 가장 큰 봉헌을 한 것이라고 칭송하십니다.

과부의 헌금은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는 '내면적 헌신의 외적인 표시'였습니다. 

이는 헌금의 의미가 액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달려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봉헌과 나눔도 바로 이러한 것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마지막 음식마저 내어주었던 사렙다의 과부처럼, 자신이 가진 동전 전부를 내어놓았던 이 가난한 과부처럼, 아니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우리에게 내어주신 예수님처럼, 우리 역시 그렇게 다른 이들과 하느님을 위해 믿음과 사랑으로 마음으로 헌신하여야 할 일입니다. 

이는 교회를 위하여 헌금을 많이 해야 한다는 모금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봉헌’의 참뜻을 일깨워 주시고자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 곳곳에서 약한 자와 억울한 자와 가난한 자에 대한 우선적인 사랑과 관심을 강조하십니다.

'참된 봉헌'은 타인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는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당신께서는 마침내는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참된 봉헌’ 제물로 내어주셨습니다.

사실 이 과부는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인데도, 그의 전부를 바쳤습니다.

 

대체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의 전부를 바치게 하였을까?

 

우리는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고 싶은 이를 만났는가? 

전부를 건네주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그분을 만났는가? 

전부를 내어주고도 가지지 못한 것마저 만들어서라도 주고 싶은, 그런 이를 만났는가? 

 

그렇게 소중하고, 그렇게 귀한 이를 만났는가? 

진정 우리가 그분을 만났다면, 어떻게 하면 그분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

그런데 ‘예수님의 마음’은 너무도 비싸서 그 어떤 많은 돈으로도 결코 얻을 수가 없지만, 또한 너무도 싸서 ‘단 돈 두 닢’으로도 얻을 수가 있는 마음입니다. 

그러니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순수한 마음의 지향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의 마음 안에는 ‘지향’이라는 보화가 있습니다. 

마음을 살피시는 분께서는 그 ‘지향’을 보십니다. 

 

마음 속 ‘지향’이 순수하면 예수님 마음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아무리 거대하고 큰 일리라도 마음 없이 한다면 결코 예수님 마음을 얻을 수 없지만, 비록 작고 보잘 것 없는 일이지라도 사랑으로 한다면 예수님 마음을 얻게 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일을 잘하느냐 못하느냐, 혹은 크고 거창한 일을 하느냐 작고 미천한 일을 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도 아니라, 오히려 ‘마음의 지향’이 얼마나 순수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곧 무엇을 하든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는 요한 카시아누스가 수도승의 목표로 제시한 '마음의 순결'(puritas cordis)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순수한 마음의 지향으로 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다 넣었기 때문이다.”

(마르 12,44)

 

주님!

제 마음의 지향을 깨끗하게 하소서.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사랑의 마음으로 하게 하소서.

전부를 내어놓은 가난한 과부처럼, 목숨을 내어놓은 당신처럼, 산 제물이 되게 하소서.

오직 당신이 저의 전부이오니, 전부를 내어주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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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바람의노래 | 작성시간 23.06.10 아멘 감사합니다!
  • 작성자성령바람 | 작성시간 23.06.10 아면! 아멘!
  • 작성자조나단 | 작성시간 23.06.10 아멘 신부님 푸른잎새님 고맙습니다.
  • 작성자들꽃1 | 작성시간 23.06.10 아멘! 감사합니다!
  • 작성자발아래 | 작성시간 23.06.10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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