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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근 신부 강론

2023년 11월 20일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작성자푸른잎새|작성시간23.11.19|조회수433 목록 댓글 14

제1독서
▥ 마카베오기 상권의 말씀 1,10-15.41-43.54-57.62-64

 

그 무렵 

10 죄의 뿌리가 나왔는데, 그가 안티오코스 임금의 아들로서 로마에 인질로 잡혀갔던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이다. 

그는 그리스 왕국 백삼십칠년에 임금이 되었다.
11 그 무렵에 이스라엘에서 변절자들이 생겨 많은 이들을 이러한 말로 꾀었다.
“자, 가서 우리 주변의 민족들과 계약을 맺읍시다.
그들을 멀리하고 지내는 동안에 우리는 재난만 숱하게 당했을 뿐이오.”
12 이 말이 마음에 들어, 

13 백성 가운데 몇 사람이 임금에게 기꺼이 나아가자, 그는 그들에게 이민족들의 규정을 따라도 좋다는 허락을 내렸다.
14 그리하여 그들은 이민족들의 풍습에 따라 예루살렘에 경기장을 세우고,

15 할례 받은 흔적을 없애고 거룩한 계약을 저버렸다.
이렇게 그들은 이민족들과 한통속이 되어 악을 저지르는 데에 열중하였다.
41 임금은 온 왕국에 칙령을 내려, 모두 한 백성이 되고
42 자기 민족만의 고유한 관습을 버리게 하였다.
이민족들은 모두 임금의 말을 받아들였다.
43 이스라엘에서도 많은 이들이 임금의 종교를 좋아하여, 우상들에게 희생 제물을 바치고 안식일을 더럽혔다.
54 백사십오년 키슬레우 달 열닷샛날, 안티오코스는 번제 제단 위에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을 세웠다.
이어서 사람들이 주변의 유다 성읍들에 제단을 세우고,
55 집 대문이나 거리에서 향을 피웠다.
56 율법서는 발견되는 대로 찢어 불태워 버렸다.
57 계약의 책을 가지고 있다가 들키거나 율법을 따르는 이는 누구든지 왕명에 따라 사형에 처하였다.
62 그러나 이스라엘에는 부정한 것을 먹지 않기로 굳게 결심한 이들도 많았다.
63 그들은 음식으로 더럽혀지거나 거룩한 계약을 모독하느니 차라리 죽기로 작정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죽어 갔다.
64 크나큰 진노가 이스라엘 위에 내린 것이다.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18,35-43

 

35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의 일이다.
어떤 눈먼 이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36 군중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37 사람들이 그에게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 하고 알려 주자,
38 그가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39 앞서 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40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셨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41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가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42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43 그가 즉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
군중도 모두 그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오늘 복음은 예리고의 눈먼 거지(바르티메오)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는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다른 이들의 꾸짖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악을 쓰듯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루카 18,39)

그 당시의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에게서 나온다는 이사야(11,1) 예언서의 말씀을 믿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가까이 오자 물으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루카 18,41)

예수님께서는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으시고, 그의 믿음을 유도하고 고백하게 하기 위해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물으십니다. 

곧 당신께 대한 믿음을 묻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청원기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곧 첫째는 믿음으로 청하는 일이요, 둘째는 자신이 바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주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청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진정 청해야 할 것, 주님 뜻에 합당한 것을 청하는 일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는지 빤히 아시지만, ‘우리가 원해야 진정 원해야 할 것’과 ‘믿음’을 깨우쳐주십니다. 

그러자 거지 장님은 신뢰와 의탁으로 청합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루카 18,41)

그런데 대체 무엇을 보아야 ‘다시 본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사용되고 있는 “보다’(anablefo)라는 단어는 ‘위를 쳐다보다’, ‘새로운 것을 보다’, ‘시력을 회복하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인이 눈을 뜨기 위해서는 바라보아야 할 대상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 ‘위에’ 달리신 예수님을 쳐다보는 일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그분의 사랑을 보게 될 때, 비로소 눈을 뜨게 될 것입니다. 

결국, 그분의 ‘사랑을 보는 눈’이 새로운 것을 보는 눈이요 믿음으로 새로 보는 영적인 눈인 것입니다. 

그것은 육신의 눈을 치유받는 것을 넘어서, 영혼의 눈을 뜨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믿음’이 ‘다시 보게 하고 구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루카 18,42)

이제는 우리가 보려고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태어나면서 물질의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면, 이제는 ‘믿음’을 통해서 영적인 세계, 곧 새로운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떠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그분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는 일이요, 지금 우리의 길을 사랑으로 동행하고 계시는 그분을 보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제 '길가'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동행하시는 주님을 '따라' 따라나서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루카 18,41)

주님!

제가 보지 못함은 태양이 떠오르지 않아서가 아니라 눈을 감고 있는 까닭입니다.

마음이 완고한 까닭입니다.

성전 휘장을 찢듯, 제 눈의 가림막을 걷어 내소서!

완고함의 겉옷을 벗어던지고, 깊이 새겨진 당신의 영혼을 보게 하소서!

제 안에 선사된 당신 사랑을 보게 하소서.

제 안에 벌어진 당신 구원을 보게 하소서.

제가 바라고 싶은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해주고 싶은 것을 바라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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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발아래 | 작성시간 23.11.20 아멘. 감사합니다.
  • 작성자들꽃1 | 작성시간 23.11.20 아멘! 감사합니다!
  • 작성자아낄래요 | 작성시간 23.11.20 감사합니다.~
    오늘도 건강하시고
    행복한 하루 되세요.~^^
  • 작성자엘리24 | 작성시간 23.11.20 아멘
  • 작성자혜원 | 작성시간 23.11.20 아멘.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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