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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근 신부 강론

2023년 12월 11일 대림 제2주간 월요일

작성자푸른잎새|작성시간23.12.10|조회수453 목록 댓글 10

제1독서
▥ 이사야서의 말씀 35,1-10

 

1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은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
2 수선화처럼 활짝 피고 즐거워 뛰며 환성을 올려라.
레바논의 영광과, 카르멜과 사론의 영화가 그곳에 내려
그들이 주님의 영광을, 우리 하느님의 영화를 보리라.
3 너희는 맥 풀린 손에 힘을 불어넣고 꺾인 무릎에 힘을 돋우어라.
4 마음이 불안한 이들에게 말하여라.
“굳세어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너희의 하느님을!
복수가 들이닥친다, 하느님의 보복이!
그분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5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6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7 뜨겁게 타오르던 땅은 늪이 되고 바싹 마른 땅은 샘터가 되며
승냥이들이 살던 곳에는 풀 대신 갈대와 왕골이 자라리라.
8 그곳에 큰길이 생겨 ‘거룩한 길’이라 불리리니
부정한 자는 그곳을 지나지 못하리라.
그분께서 그들을 위해 앞장서 가시니 바보들도 길을 잃지 않으리라.
9 거기에는 사자도 없고 맹수도 들어서지 못하리라.
그런 것들을 볼 수 없으리라.
구원받은 이들만 그곳을 걸어가고
10 주님께서 해방시키신 이들만 그리로 돌아오리라.
그들은 환호하며 시온에 들어서리니 끝없는 즐거움이 그들 머리 위에 넘치고
기쁨과 즐거움이 그들과 함께하여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라.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5,17-26

 

17 하루는 예수님께서 가르치고 계셨는데, 갈릴래아와 유다의 모든 마을과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도 앉아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힘으로 병을 고쳐 주기도 하셨다.
18 그때에 남자 몇이 중풍에 걸린 어떤 사람을 평상에 누인 채 들고 와서, 예수님 앞으로 들여다 놓으려고 하였다.
19 그러나 군중 때문에 그를 안으로 들일 길이 없어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 내고, 평상에 누인 그 환자를 예수님 앞 한가운데로 내려보냈다.
20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21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의아하게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저 사람은 누구인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22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23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24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에 걸린 이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25 그러자 그는 그들 앞에서 즉시 일어나 자기가 누워 있던 것을 들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26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두려움에 차서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 하고 말하였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놀라운 사실이 선언되었습니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루카 5,20)
예수님께서는 ‘함께 온 이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죄의 용서’를 선언하십니다. 

 

그러나 이 엄청난 사실 앞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저 사람은 누구인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루카 5,21)

참으로 그렇습니다.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단 한 분, 오직 하느님이 아니고서야 그 누구도 용서할 수가 없거늘, 감히 누가 “죄를 용서받았다.”고 선언할 수 있을까?

더구나 하느님께서 용서하셨다는 것을 대체 누가 알 수 있을까? 

하느님이 아니고서야 말입니다. 

그러니 결국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루카 5,24)

그리고 그 증거로 중풍병자를 치유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그러자 그는 그들 앞에서 즉시 일어나 자기가 누워 있던 것을 들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루카 5,24-25)

여기서 우리는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치유 받았어도 '들것'을 여전히 들고 다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몸이 치료되었다고 해서 몸을 버려두고 다닐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치유 받은 이들이요, 이미 용서받은 이들입니다. 

 

그러나 그 상처는 지니고 다닙니다. 

왜냐하면 ‘상처’는 ‘치유 받았음을 보여주는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할례’라는 상처를 ‘하느님 백성의 표지’로 지니고 다녔듯이,

야곱이 ‘엉덩이뼈의 상처’를 ‘축복의 표지’로 지니고 다녔듯이,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상처’를 ‘구원의 표지’로 몸에 지니고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 '들것'에 메여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상처’에 메여있을 필요도 없습니다.

 

이제는 '들것'을 기꺼이 들고 다녀야 할뿐 아니라,

오히려 ‘들것’에 아픈 형제들을 태워서 들고 아버지의 집으로 가야할 일입니다.

 

마치 몇 명의 남자들이 중풍병자를 ‘들것’에 태워 들고 왔듯이,

내 형제들이 나를 '들것'에 태워 예수님께 데려왔듯이,

예수님께서 ‘십자가’라는 ‘들것’ 위에 우리의 죄와 인류를 들고 아버지께로 가셨듯이 말입니다.

그처럼 우리는 십자가의 상처를 ‘구원의 표지’로 지니게 다닙니다.

용서받고 치유 받았음의 표지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저희를 먼저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치유를 입었습니다.

신령스런 주님의 사랑을 말입니다.

 

이토록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습니다.' (마태 5,26)

아멘.

하오니, 주님!
들것에서 일어나게 하소서. 

일어나 들것을 들고 가게 하소서.

들것 위에 당신의 사랑을 들고 다니게 하소서. 
십자가의 상처에서 당신 사랑을 드러내셨듯이, 
저도 상처에서 저를 일으키신 그 사랑을 드러내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루카 5,24)

 

주님!

당신께서는 치유 받은 이에게 들것이 더 이상은 필요하지 않으나 그것을 들고 가라 하십니다.

하오니 더 이상은 상처를 아파하거나 거부하지 않게 하소서.

당신이 지니신 십자가의 상처처럼, 구원의 표시로 들고 가게 하소서.

이제는 사랑을 퍼올리는 구원의 샘이 되게 하소서.

아픈 이를 태워 나르는 들것이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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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들꽃1 | 작성시간 23.12.11 아멘! 감사합니다!
  • 작성자감사하는 사람 | 작성시간 23.12.11 아멘
  • 작성자앞동산 | 작성시간 23.12.11 아 멘 !
    감사합니다 ^^
  • 작성자아낄래요 | 작성시간 23.12.11 오늘도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한 하루 되세요.~^^
  • 작성자발아래 | 작성시간 23.12.11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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