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이영근 신부 강론

2024년 6월 18일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작성자푸른잎새|작성시간24.06.18|조회수504 목록 댓글 9

제1독서
▥ 열왕기 상권의 말씀 21,17-29

 

나봇이 죽은 뒤에, 

17 주님의 말씀이 티스베 사람 엘리야에게 내렸다.
18 “일어나 사마리아에 있는 이스라엘 임금 아합을 만나러 내려가거라.
그는 지금 나봇의 포도밭을 차지하려고 그곳에 내려가 있다.
19 그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주님이 말한다. 

살인을 하고 땅마저 차지하려느냐?’
그에게 또 이렇게 전하여라. 

‘주님이 말한다.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던 바로 그 자리에서 개들이 네 피도 핥을 것이다.’”
20 아합 임금이 엘리야에게 말하였다. 

“이 내 원수! 또 나를 찾아왔소?”
엘리야가 대답하였다. 

“또 찾아왔습니다.
임금님이 자신을 팔면서까지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21 ‘나 이제 너에게 재앙을 내리겠다. 

나는 네 후손들을 쓸어버리고, 아합에게 딸린 사내는 자유인이든 종이든 이스라엘에서 잘라 버리겠다.
22 나는 너의 집안을 느밧의 아들 예로보암의 집안처럼, 그리고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집안처럼 만들겠다.
너는 나의 분노를 돋우고 이스라엘을 죄짓게 하였다.’
23 주님께서는 이제벨을 두고도, ‘개들이 이즈르엘 들판에서 이제벨을 뜯어 먹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24 ‘아합에게 딸린 사람으로서 성안에서 죽은 자는 개들이 먹어 치우고, 들에서 죽은 자는 하늘의 새가 쪼아 먹을 것이다.’”
25 아합처럼 아내 이제벨의 충동질에 넘어가 자신을 팔면서까지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지른 자는 일찍이 없었다.
26 아합은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쫓아내신 아모리인들이 한 그대로 우상들을 따르며 참으로 역겨운 짓을 저질렀다.
27 아합은 이 말을 듣자, 제 옷을 찢고 맨몸에 자루옷을 걸치고 단식에 들어갔다.
그는 자루옷을 입은 채 자리에 누웠고, 풀이 죽은 채 돌아다녔다.
28 그때에 티스베 사람 엘리야에게 주님의 말씀이 내렸다.
29 “너는 아합이 내 앞에서 자신을 낮춘 것을 보았느냐?
그가 내 앞에서 자신을 낮추었으니,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내가 재앙을 내리지 않겠다.
그러나 그의 아들 대에 가서 그 집안에 재앙을 내리겠다.”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5,43-4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3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4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45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46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47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오늘 복음은 마지막 여섯 번째의 새로운 의로움으로, ‘완전한 사랑’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레위기> 19장 18절의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라는 말씀을 넘어서,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14)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이웃과 원수를 구분해서 처우를 달리 해온 그동안의 관행을 완전히 뒤엎어, 이웃이나 원수를 가리지 않고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원수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또는 우리 자신에게서 미움을 없애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혹은 단지 사랑에 한계를 두지 말라는 것만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는 모두를 ‘있는 그대로’를 ‘호의로’, ‘자애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부족한 이를 부족한 채로, 원수를 원수인 채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가 나를 미워하지 않게 되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미워한 채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나아가서는 그가 부족하기에, 바로 그 이유로 더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가 사랑이 더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죄인이기에 처벌받아야 하기보다, 용서받아야 할 대상이듯이 말입니다. 

동시에 이는 자기 자신만 구원받아야 할 존재인 것이 아니라, 타인도 구원받아야 할 존재임을 깨우쳐줍니다.

자기 자신만 사랑받아야 하는 존재인 것이 아니라, 타인도 사랑받아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는 말씀에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마태 5,44)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그를 위해 기도하라고 덧붙이십니다. 

‘사랑’은 애당초 자기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스테파노가 돌을 맞아 죽어가면서도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했던 것처럼(사도 7,60),

사도 바오로가 고난을 겪으면서도 박해하는 유대인들을 ‘위하여’ 기도했던 것처럼(1코린 4,12),

당신께서 십자가에서 죽어가면서도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셨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나 이웃만 사랑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자기에게 잘 해주고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라고도 하지 않으십니다.

사실 친구를 사랑하는 사람은 죄는 짓지 않을지 몰라도 의로움을 행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친구가 아닌 원수를 사랑할 때라야 의로움을 행하게 됩니다.

 

악을 피하는 것을 넘어 ‘선’을 행할 때라야 비로소 완전해지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의로움은 단지 죄짓지 않고 무난하게 살기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베푸는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사랑’이 우리를 하느님과의 ‘의로운 관계’로 이끌어갑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로마 13,10)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태 5,48)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마태 5,44)

주님!

되갚지 않을 뿐 아니라 억울한 고통도 기꺼이 지게 하소서.

미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받아들여 사랑하고,

사랑할 뿐 아니라 기도하게 하소서.

죄짓지 않을 뿐 아니라 죄인을 용서하고,

용서할 뿐 아니라 선을 베풀게 하소서.

개방할 뿐 아니라 받아들여 수용하고,

수용할 뿐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변형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atti | 작성시간 24.06.18 Amen.
  • 작성자들꽃1 | 작성시간 24.06.18 아멘! 감사합니다!
  • 작성자앞동산 | 작성시간 24.06.18 아 멘 !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감사합니다 ^^
  • 작성자발아래 | 작성시간 24.06.18 아멘. 감사합니다.
  • 작성자아낄래요 | 작성시간 24.06.18 오늘도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한 하루 되세요.~^^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