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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근 신부 강론

2024년 7월 15일 월요일 ·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작성자푸른잎새|작성시간24.07.14|조회수518 목록 댓글 12

제1독서
▥ 이사야서의 말씀 1,10-17

 

10 소돔의 지도자들아,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고모라의 백성들아, 우리 하느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라.
11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굳기름에는 물렸다.
황소와 어린양과 숫염소의 피도 나는 싫다.
12 너희가 나의 얼굴을 보러 올 때 내 뜰을 짓밟으라고 누가 너희에게 시키더냐?
13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분향 연기도 나에게는 역겹다.
초하룻날과 안식일과 축제 소집, 불의에 찬 축제 모임을 나는 견딜 수가 없다.
14 나의 영은 너희의 초하룻날 행사들과 너희의 축제들을 싫어한다.
그것들은 나에게 짐이 되어 짊어지기에 나는 지쳤다.
15 너희가 팔을 벌려 기도할지라도 나는 너희 앞에서 내 눈을 가려 버리리라.
너희가 기도를 아무리 많이 한다 할지라도 나는 들어 주지 않으리라.
너희의 손은 피로 가득하다.
16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17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0,34─11,1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34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35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36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8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9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40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41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4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11,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다 지시하시고 나서, 유다인들의 여러 고을에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려고 그곳에서 떠나가셨다.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하신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마태 10,34)

분명 예수님께서는 '평화의 왕'일진데, 어째서 평화에 칼이 필요한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의 평화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병든 환자에게는 수술이 필요한 까닭입니다.

우리 심장에 꽂혀 우리의 안주와 이기심을 도려내고, 세상에 꽂혀 세상의 불의와 부정을 절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우리 가슴에 꽂혀 우리를 살리는 칼이요, 이 세상에 던져져 이 세상을 살리는 칼입니다. 

죽이기 위한 칼(살인검)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칼(활인검)입니다. 

 

그래서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마태 5,9)

평화로운 사람이 행복한 것이 아니라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칼을 주십니다. 

이처럼 말씀은 우리에게 변혁을 요청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서는 한 권의 혁명서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성령을 받고 뒤집혀진 혁명가들입니다.

그리고 '참행복 선언'을 선언하는 진복팔단은 혁명선언서입니다.

그것은 첫째가 꼴찌되고 꼴찌가 첫째되는 혁명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강론에서 말씀하셨습니다. (2013.11.15)
“만약 그리스도인이 혁명가가 아니라면, 그는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은총의 혁명가가 되어야 합니다. 

참으로 아버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은총은 우리를 혁명가가 되게 만듭니다.” 

이 혁명은 진리의 말씀인 쌍날칼에 의해 실행되는 혁명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속셈과 생각을 갈라냅니다.”

(히브 4,12)

‘내 칼을 받아라.’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의 칼’을 선사하십니다. 

그것은 ‘타인에게’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던져라’고 주는 칼입니다.

자기 자신의 심장에 던지라고 주는 칼입니다.

 

사실 중병에 걸린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금은보석의 값비싼 선물더미가 아니라, 그를 수술할 수 있는 칼인 것입니다.

병든 몸에다 금은보석으로 치장했다 해서 결코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듯, 병자는 칼로 병을 도려내는 수술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예수님께서 던지신 칼이야말로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칼입니다.

평화를 이루기 위한 칼이요, 말씀을 이루기 위한 쌍날칼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내 목에 칼을 견주시고 말씀하십니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마태 10,39)

이처럼 '제자의 길'은 그야말로 도전입니다.

결코 양다리를 걸칠 수도, 두 주인을 섬길 수도 없는, 아니 자신의 목숨마저 내걸어야 하는 도전입니다.

그것은 사도 요한의 권고대로, “말과 혀가 아닌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하는 사랑”(1요한 3,18 참조)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마태 10,34)

 

주님!

제 목에 칼을 견주소서.

당신 영의 칼로 저의 자애심을 내리치소서!

제 심장에 당신 사랑의 불꽃이 타오르게 하소서!

그 어느 것도 당신보다 더 사랑하지 말게 하소서!

말과 혀로써가 아니라,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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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앞동산 | 작성시간 24.07.15 아 멘 !
    '죽이기 위한 칼(살인검)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칼(활인검)입니다.'
    감사합니다 ^^
  • 작성자발아래 | 작성시간 24.07.15 아멘. 감사합니다.
  • 작성자아낄래요 | 작성시간 24.07.15 오늘도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한 하루 되세요.~^^
  • 작성자의자 | 작성시간 24.07.15 말씀을 위한칼
    평화를 위한
    쌍칼날
    감사합니다
  • 작성자가을비 | 작성시간 24.07.15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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