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5월 16일 가해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요한 16,23ㄴ-28)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의 의미>
작성자stellakang작성시간26.05.16조회수149 목록 댓글 62026년 5월 16일 가해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요한 16,23ㄴ-28)
복음
<아버지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믿었기 때문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6,23ㄴ-2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3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24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25 나는 지금까지 너희에게 이런 것들을 비유로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더 이상 너희에게 비유로 이야기하지 않고
아버지에 관하여 드러내 놓고 너희에게 알려 줄 때가 온다.
26 그날에 너희는 내 이름으로 청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청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27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28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https://youtu.be/N3BO0oZpGsQ?si=vpPPCUX6Croy4l8_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의 의미
"그 날에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청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바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요한 16,26-27)
찬미 예수님! 부활 제6주간 토요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엄청난 선언을 하십니다. 보통 우리는 기도를 마칠 때마다 습관적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혹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 사이의 '중개자'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대신 청해주겠다는 말이 아니다. 바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신다." 이 말씀은 실로 영적인 원자폭탄과도 같은 선언입니다. 이제 더 이상 우리가 대사제나 예언자 뒤에 숨어서 자비를 구걸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창조주 하느님 아버지의 집무실 문을 직접 열고 들어가 "아버지, 저 왔습니다!"라고 외칠 수 있는 '직통 회선'이 개통되었다는 위대한 독립선언문인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쓰레기 같은 죄악을 뒤집어쓰고 살아가던 우리 인간이 그토록 거룩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품으로 직접 뛰어드는 일이 가능해진 것일까요? 이 기막힌 영적 신비를 완벽하게 증명해주는 현대 의학의 위대한 역사가 있습니다. 바로 인류 최초로 성공한 '장기 이식 수술'의 이야기입니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인간의 장기를 다른 사람에게 이식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불가능의 영역이었습니다. 훌륭한 외과 의사가 건강한 신장을 환자에게 이식해 주어도, 환자는 며칠을 넘기지 못하고 끔찍한 고통 속에 사망했습니다. 이유는 우리 몸의 '면역 거부 반응'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몸의 백혈구는 외부에서 자신과 다른 낯선 이물질, 즉 '다른 DNA'를 가진 장기가 들어오면 그것을 생명을 돕는 친구로 보지 않고 내 몸을 파괴하려는 '적'으로 간주합니다. 그래서 전 면역 세포를 총동원하여 미친 듯이 그 낯선 장기를 공격해 박살 내 버립니다. 자신과 설계도가 다른 존재는 결코 품어 안을 수 없는 것, 이것이 생물학의 냉혹한 법칙입니다.
구약 시대의 인간이 하느님께 직접 다가가지 못한 이유가 바로 이 영적인 면역 거부 반응이었습니다. 하느님은 티끌만 한 죄도 용납하지 않으시는 불타는 거룩함 자체이시며, 인간은 교만과 탐욕이라는 죄악의 DNA로 가득 찬 덩어리입니다. 낯선 이물질인 죄인이 하느님 아버지의 품에 다가간다면, 하느님의 거룩함(영적 면역 체계)은 그 이물질을 즉시 불태워 멸망시켜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1954년 12월 23일, 미국 보스턴의 브리검 병원에서 조셉 머리(Joseph Murray) 박사가 세계 최초로 신장 이식 수술에 완벽하게 성공합니다. 만성 신부전증으로 죽어가던 리처드라는 청년에게, 그의 동생 로널드가 자신의 신장을 기증하여 살려낸 것입니다. 수술 후 리처드의 몸에서는 아무런 면역 거부 반응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이런 기적이 가능했을까요? 조셉 머리 박사가 수술을 시도한 이 두 형제가 바로 '일란성 쌍둥이'였기 때문입니다. 일란성 쌍둥이는 100퍼센트 완벽하게 동일한 유전자(DNA)를 공유합니다. 형 리처드의 백혈구들이 동생 로널드의 신장을 검사해 보니, 자기 몸의 DNA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백혈구들은 그 신장을 공격하는 대신 "아, 이것은 낯선 적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구나!"라고 인식하며 기꺼이 자기 몸의 일부로 품어 안았습니다. (출처: 조셉 머리, 『신장 이식의 역사』).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여라"라고 하신 것은 바로 이 일란성 쌍둥이의 자격을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름'은 곧 그 존재를 이루는 '설계도(DNA)'를 뜻합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이름을 남기고 가시는 이유는, 당신을 구성하는 완벽한 하느님의 유전자,
즉 '사랑과 희생이라는 하늘의 DNA'를 우리 영혼에 통째로 이식하여,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그리스도'로 알아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아버지가 우리를 보실 때, 우리 안에서 당신의 외아들 예수님의 DNA를 발견하시기에 아무런 거부 반응 없이 우리를 친히 안아주시고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거룩한 그리스도의 DNA인 '이름'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일까요? 그것은 회장님의 이름을 받았으니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그 이름의 권한은, 오직 그 이름을 내어주신 분의 뜻(설계도)대로 움직일 때만 발휘됩니다. 이 거룩한 DNA를 온전히 받아들여, 그 이름의 권한을 완벽하게 행사하신 유일한 분이 계십니다. 바로 성모 마리아이십니다.
수태고지의 순간을 떠올려 보십시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카 1,38). 성모님은 자기를 보존하려는 인간적인 자아의 방어 기제를 완전히 꺼버리셨습니다. 마리아가 자아를 완전히 비웠을 때, 그리스도의 DNA가 그녀의 영혼과 태중에 100퍼센트 완벽하게 이식되었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DNA와 완벽하게 일치된 성모님이 위임장을 어떻게 행사하셨는지, 우리는 갈릴래아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똑똑히 봅니다.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예수님은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라고 거절하듯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성모님은 하인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라고 당당히 명령하십니다.
어떻게 그러실 수 있었을까요? 성모님의 영혼이 예수님의 DNA(하느님의 사랑)와 완벽하게 동기화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의 뜻이 곧 아드님의 뜻이었기에, 그녀가 청하는 것은 하늘의 거부 반응 없이 즉각적으로 기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성모님은 자아가 조금도 없으셨기에, 하느님의 거룩함 앞에 설 때 거부 반응을 막아줄 '면역 억제제'가 전혀 필요 없으신 완벽한 일치 그 자체이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안타깝게도 성모님처럼 온전히 그리스도의 DNA만을 품고 있지 못합니다. 세례를 받아 예수님의 이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는 여전히 내 이기심, 내 고집, 원수를 미워하는 분노라는 '이질적인 낡은 DNA'가 살아서 시퍼렇게 날뛰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불완전한 상태로 거룩하신 하느님 아버지 앞에 선다면 어떻게 될까요? 마치 다른 사람의 장기를 이식받은 환자의 몸에서 끔찍한 면역 거부 반응이 일어나듯, 하느님의 그 맹렬한 거룩함이 이질적인 우리 영혼의 찌꺼기를 공격하여 우리는 그 자리에서 타죽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께 간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가신 이유는, 바로 이 불완전한 우리를 위해 당신 친히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어 우리의 '면역 억제제'가 되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자녀를 끔찍이 사랑하는 어머니의 모습과 같습니다. 자녀가 아버지의 신용카드(이름)를 받아 들고는 자기 마음대로 엉뚱한 물건을 잔뜩 사고 말썽을 부립니다. 원칙대로라면 엄격한 아버지는 그 자녀를 호적에서 파내거나 엄벌에 처해야 합니다. 그때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다가갑니다. 어머니는 자녀를 대신해 온갖 고생을 하고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께 매달립니다.
"여보, 저 아이가 아직 어리고 철이 없어서 당신의 이름으로 엉뚱한 짓을 하긴 했지만, 제발 제가 당신을 위해 치른 희생을 보아서라도 저 아이의 다름과 부족함을 조금만 참아주세요. 제가 저 아이를 올바르게 키워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피가 바로 이 어머니의 눈물 어린 희생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대전에 나아가 당신의 피를 내보이시며 간구하십니다. "아버지, 저 아이들이 아직 제 DNA를 완벽히 갖추지 못해 미움과 탐욕이라는 거부 반응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십자가에서 쏟은 제 피를 면역 억제제로 삼아주십시오. 저들이 온전한 그리스도로 자라날 때까지 저들의 다름을 부디 참아주시고, 치명적인 거부 반응을 유예해 주십시오."
우리가 오늘날 수많은 죄를 짓고도 성당에 나와 기도를 올릴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가 영적인 면역 억제제가 되어 하느님 아버지의 진노와 심판을 덮어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가 신앙생활을 통해 다다라야 할 목표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언젠가 이 영적인 '면역 억제제'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는 날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내 안의 이기적인 자아와 낡은 유전자가 완전히 죽고, 오직 성모님처럼 그리스도와 완벽히 하나의 뜻, 하나의 본성으로 일치되는 그날입니다.
그때가 오면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 뜻이 곧 하느님의 뜻이 되었기에,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성모님이 그러하셨듯 우리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하늘의 은행에서 즉각적으로 결제될 것입니다. 그 완벽한 일치의 순간에 우리 영혼에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폭발적인 환희가 밀려올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복음에서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요한 16,24).